“조선 여성은 본래부터 다 용맹합니다”
광복 77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의 무장투쟁기
짧지만 뜨거웠던 그 생애를 복원하다
모스크바, 상하이, 하얼빈, 신의주…
항일과 혁명의 한가운데서 목숨을 걸다
노동소설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한국 근현대사 속 그늘에 가려진 인물들을 조명하는 데 힘써온 안재성의 장편소설 『항일혁명전사 김명시』가 2019년 출간 이후 3년 만에 미디어창비에서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항일혁명전사 김명시』는 항일 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생애를 소설로 재현해낸 작품으로, 조국 해방과 함께 빈부 격차 없이 모든 민중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꾼 인간의 치열한 삶을 생생하게 그린 역작이다.
김명시는 190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김인석은 김명시가 열세 살 되던 해에 마산 3․1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오 남매 중 삼 남매와 어머니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운동가 집안이었다. 1925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던 김명시는 러시아어뿐 아니라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항일무장투쟁 진영에 합류한 후로는 스베츠로바, 김희원 등 열 개가 넘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전장을 누볐다.
소설은 김명시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혁명이 가져올 희망, 사랑, 슬픔 중 가장 먼저 다가온 희망에 취”한 그는 독립과 자유를 염원하며 하얼빈 일본 영사관 습격, 조선의용대의 태항산 전투 등에 앞장선다. 책 속에는 주인공 김명시 외에도 조봉암, 여운형, 김단야, 박헌영 등 혁명의 희망을 품고 조국의 앞날에 일생을 바친 실존 인물들의 삶이 녹아 있다. 소설가 안재성은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에 뛰어든 이들의 이야기를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기록한다. 그런 한편, 가상 인물 권오채와 이상훈을 등장시켜 서사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격동의 시대를 능란하게 담아냈다.
‘조선의 잔 다르크’라 불리던 조선의용군 김명시 장군
2022년 8월 15일, 오래도록 기다려온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
“잔학한 침략군에 맞서 말을 타고 총을 쏘며 대륙을 달리고, 적진 한복판에서 치마 속에 권총을 숨기고 돌아다니며 한국 청년들을 조직하고, 혹독한 고문과 7년간의 감옥살이에서 풀려나자마자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최전선을 찾아다니던 그는 당대 최고의 항일전사 중 한 명으로, ‘백마 탄 여장군’이라는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열린사회희망연대’에서는 김명시 장군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것을 신청했으나 두 차례에 걸쳐 인정받지 못하다 2022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 이번 독립유공자 결정은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1945년 11월 21일 「독립신보」)이라던 그의 말에 대한 눈물 겨운 보상이자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 속 인물을 향한 열렬한 지지가 되어줄 것이다.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장군’ 호칭까지 받았으나, 의문의 죽음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명시,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어둠의 시간이었지만 그렇기에 그의 삶은 더욱 빛난다.
역사의 비극 속에 잊혀진 여성 영웅의 이름을 되살리다
김명시는 해방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여성으로서는 최고 서열이었으나, 조선공산당이 불법화되면서 지하활동을 펼치다 만 3년 만인 1949년에 체포된다. 그해 가을 김명시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만, 독립운동과 민족해방 투쟁에 운명을 걸고 온갖 고초를 이겨낸 불굴의 여성 운동가가 제 손으로 생을 마감했으리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독립운동에 기꺼이 삶을 바친 이가 해방된 조국에서 이와 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역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항일혁명전사 김명시』는 이념 갈등으로 매몰된 역사의 불행한 단면을 재조명하고, 자유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김명시를 다룬 첫 소설로 우리 곁에 오래 머물 것이다. 혁명은 계속된다.
차례
1. 레닌의 나라
2. 무학산
3. 희망
4. 참새 언덕에서
5. 최초의 제비들
6. 상해탄
7. 대륙의 유랑민
8. 폭동의 시간
9. 이별
10. 코뮤니스트
11. 공장 뉴스
12. 봉암새
13. 얼음의 강
14. 초원의 노래
15. 적구공작대
16. 태항산
17. 불멸
뒷이야기
작가의 말 _개정판을 내며
본문 속으로
시위가 잠잠해지자 헌병들은 집집마다 뒤져 태극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흰 종이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그려넣고 네 귀퉁이에 막대 모양의 사괘를 그린 상징물에 불과했는데도 태극기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일단 태워버리고 필요할 때 다시 그려도 되는 것을 차마 없애버리지를 못했다. 다들 어떻게든 감춰놓으려고만 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헌병들은 군화를 신은 채 방 안에까지 들어와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옷장을 엎어놓고 천장을 뜯다 못해 아궁이와 굴뚝, 심지어 변소에 쌓아놓은 잿더미 속까지 뒤졌다. 태극기가 발견되면 주인을 잡아다 혹독한 고문을 가한 뒤 90대의 태형에 처했다. 그래도 다들 태극기를 숨겼다. 항아리에 넣어 담장 밑에 묻기도 하고, 솜옷 안섶에 넣고 단단히 꿰매기도 했다. (22면)
그들에게는 밤이 되면 찾아갈 집도 있고, 농사지을 땅도 있었다. 아무리 부패했다 하더라도 마적이 나타나면 보호해줄 경찰과 군대도 있었다. 집도 땅도 없고, 수중의 돈도 다 떨어져가는 조선인 유랑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였다.
화강암 계단에 걸터앉은 홍남표는 부러운 표정으로 만주인들을 바라보는 아낙네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조상이 외침에 시달렸던 건 우리가 못나서가 아니라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만주의 여진과 거란이며 몽골족에 왜족들까지 풍요로운 조선반도를 차지하려고 쳐들어왔던 거네. 우리만큼이나 기름진 땅인 중원의 한족들이 위대한 문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역사를 변방 야만족에게 빼앗던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이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이 이 삭막한 만주로 밀려나와 여진족에게 빌어먹는 신세가 되었군.” (134면)
그날이 오면 어떤 세상이 열릴까? 그날이 오면 기뻐 춤추며 웃게 될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게 될까? 기뻐서 울든, 죽은 동지들이 그리워 울든 펑펑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아니, 그날을 생각만 해도 벌써 눈물이 고였다. 그날만 오면 조선인의 고통과 슬픔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리라.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 기대하는 죄수처럼, 막연한 희망이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아기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향기로운 생명의 내음처럼 그녀를 설레게 했다. (152~153면)
시가지를 빠져나오는 내내, 김명시는 버려둔 시신들을 생각했다. 조선이 해방되는 날,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는 날, 그들을 대신해 눈물을 흘려주리라 생각했다. 이미 시신이 되었음에도 다시 한번 일본도에 목이 잘려 장터에 전시된 뒤 기름에 불태워져 흔적도 없이 광야에 뿌려질 그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총탄은 대원들의 머리 위로, 귓전으로, 발아래 흙바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귓전을 스쳐가는 쉿쉿 소리, 흙바닥이나 담벼락에 부딪쳐 으깨지며 내는 둔탁한 소리들이 심장을 대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그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160면)
“홍 선생님, 인간이란 동물은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요? 교전 중인 적군도 아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민간인을 이렇게 죽이다니요. 이런 짓을 하는 인류를 구제하겠다고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의 존재에 회의가 느껴지네요.”
홍남표는 침통하게 말했다.
“이 역시 자본주의 제국들의 침략 전쟁이 빚어낸 비극이지. 자본주의만 아니라면, 전쟁만 없다면 평범한 농민이던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하겠나?” (169~170면)
“언니, 건강 잘 챙기세요. 여기서는 살아남는 게 투쟁이에요.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게 저놈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거예요. 저는 나가자마자 다시 항일 전선에 뛰어들 거예요. 공산주의를 하든 자본주의를 하든 그건 독립된 뒤의 머나먼 이야기죠. 언니도 부디 건강히 살아 나와서 함께해요.” (246면)
“아, 용맹한 여성 전사! 이름이 김명시라고 했지요? 대단한 여전사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대체 어디 군사학교를 다녔기에 그리 용감무쌍한 겁니까?”
중국 정부군 장교에게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김명시는 곁에 서 있던 이화림의 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이화림은 김명시보다 한 살 많았으나 친구로 지내는 사이였다.
“조선 여성은 본래부터 다 용맹합니다. 여기 이화림도 있습니다!”
“아! 이화림 전사! 김명시 전사가 오기 전부터 잘 압니다, 잘 알아요! 어젯밤 고지 전투에서도 두 여성 전사가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은 과연 위대합니다!” (260~2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