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과 능청으로 담아낸 삶과 죽음의 경계
사소한 사물과 평범한 일상에서 따스한 삶의 한 장면을 발견해온 이정록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정말』이 출간되었다.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2009 창비)를 제외하면 4년만에 펴내는 이번 신작시집에서 시인은 보다 성숙해진 눈길로 우리네 사람살이를 돌아본다. 남루한 삶도 죽음의 공허함도 짐짓 능청스럽게 풀어내는 그의 해학이 오히려 관조의 깊이로 다가온다.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된 고리이다. 삶은 항상 죽음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죽음 또한 삶과 단절되지 않은 연장선상에 놓인다. “삶도 죽음도 병풍 두께 2.5cm”(「저승까지 거리는」 『콧구멍만 바쁘다』) 라고 말하는 시인이기에 그의 시는 삶 또는 죽음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한걸음 물러난 담담한 어조로 일관한다. 가령, 갓난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이가 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를 유려하게 그려낸 「울음의 진화」가 그러하다.
포대기에 싸인 너는 울음으로 존재한다 울음소리는 어미에게로만 향한다 한 생명의 뿌리가 동백꽃처럼 빨갛다 //(…) // 눈물은 드디어 끝장난다 흡(吸)! 눈물의 길마저 거둬들인다 순간 임종을 지키던 피붙이들의 손발과 어깨와 콧구멍이 바빠진다 슬하 남은 것들이 저승으로 떠난 첫 날숨을 울음으로 들여앉힌다 호(呼)! 숨통은 한통속인 것이다 둥근 우주의 숨길이 그리하여 한 끈으로 이어진다 (「울음의 진화」 부분)
삶과 죽음을 서술하는 담담함은 무엇보다 해학과 능청으로써 가능해진다. 고된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들도 그의 시 속에선 눅눅함 없이 한숨을 날려보낸다. 이러한 능청스러움은 그래서 쓸쓸히 시들어가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위로한다.
삼우제 마치자 장대비 쏟아진다 / 혼자 남은 아들이 무덤에 남색 비닐포장을 덮는다 / 채 가라앉지 않은 슬픔에게 농을 친다 // -저승길에 한복 입혀드리냐? 쪽빛이 곱다야 // -평생 머릿수건 벗으실 날 없었는디, / 자식이란 놈이 또 씌워드린다야 // -아저씨 옆에 나란히 누우니께 젖무덤 같다야 / 그러고 본께 한복이 아니라 부라자다야 // (…) // 거시기 끈을 맞잡고 실랑이 벌이는 사이 / 먹구름 속 햇살이 배시시 엿본다 / 허공의 알종아리에 핏줄 돋는다 / 황토무덤에서 나누는 입 근지러운 것들의 싸한 마음을 / 적시겠단 건가? 말리겠단 건가? / 여우비 내린다 (「여우비」 부분)
시인의 이같은 면모는 많은 부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발문을 쓴 한창훈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동안 정록이가 쓴 신 줄 알았는데 순전히 엄마 말을 받아쓰기해놓은 거로구만그래”라고 할 만큼. 그래서 시집에는 ‘엄니’의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엄니의 남자」 전문)
우리네 어머니들이 모두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시인은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다른 여성들의 존재에도 자주 눈을 돌린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어느 시골마을에서 가난과 죽음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운 고단한 세월을 보내왔지만 그럼에도 인생을 달관한 듯한 태도로 웃음을 내보이는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욕쟁이 목포홍어집 / 마흔 넘은 큰아들 /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 새우눈으로 웃는다 //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 꽃잎 한 점 넣어준다 // (…) //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 우리집 큰놈은 이제 /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홍어」 부분)
어머니 못지않게 시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역시 크게 남아 있다. 어느덧 중년이 된 그에게 아버지의 기억은 옛일의 회상을 넘어 시인 자신이 아버지라는 존재로 어엿하게 자리하기 위해 반추하는 현재형의 사건이다.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 / 어릴 적에 들은 아버지의 욕 / 새벽에 깨어 애들 운동화 빨다가 / 아하, 욕실 바닥을 치며 웃는다 // 사내애들 키우다보면 / 막말하고 싶을 때 한두 번일까마는 / 아버지처럼, 문지방도 넘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 하지만, 삼십년은 너끈히 건너갈 매운 눈빛으로 / ‘개자식’이라고 단도리칠 수 있을까 // 아이들도 훗날 마흔 넘어 / 조금은 쓸쓸하고 설운 화장실에 쪼그려 제 새끼들 신발이나 빨 때 / 그제야 눈물방울 내비칠 욕 한마디, 어디 없을까 /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 “광천 쪽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듯 서글퍼진다 (「아버지의 욕」 부분)
자연히 시인에게 가족은 사람이 더불어 사는 세상의 출발점인 동시에 이 아득한 인생에서 최후의 안식처가 되는 공간이다. 때로는 식구들과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로, 때로는 식솔을 거느린 가장의 삶에의 의지로, 가족은 그렇게 그의 시를 이루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 작은 입이 둘이고 크게 벌린 입이 둘이다 / 그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 식은 개고기만 엉겨붙어 있다 / 개처럼 엎드려 땅을 치는 통곡이 있다 // 아니다,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면, //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에 두고 / 방싯방싯 웃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 옹기종기 그릇이 늘어나는 경사가 있다 / 곡(哭)이란 글자엔, 일터로 나간 어른 대신 /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 밤하늘 별자리까지 흔들어대는 목청이 있다 (「식구」 전문)
‘아이들을 사랑하는, 근육이 찰진, 최강말빨의 시인’(한창훈)이라는 흥미로운 면모에 걸맞게 그의 시는 따뜻하고 당당하고 매력적이다. 중견시인으로서 입지를 다져왔지만 그는 여전히 시가 있어 뜨거운 포부를 품는다. 그리하여 그는 앞으로도 “해왔던 대로 할 것이다. 과하지 않고 헐하지 않게 살고 읽고 쓸 것이다.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미워할 것은 미워하며 부모처럼 늙어갈 것이다.”(「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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