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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사는 집

판자촌의 삶과 죽음

Description:...

그 많던 판잣집은 어디로 갔을까?

그곳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판자촌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아갔을까? 이 책은 한때 서울 인구의 40% 가까이가 살기도 했던 판자촌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의 역사를 추적한다. 판자촌의 형성과 밀집, 그리고 소멸 과정은 곧 한국경제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폭력성도 숨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을 잔인하게 철거하고, 그들을 내쫓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큰 이익을 봤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실제 판자촌의 역사는 철거의 역사나 다름없었고, 그에 저항해 싸운 역사이기도 했다.”(153쪽)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에 정착하기 위한 전지 기지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공동체이기도 했던 판자촌은 1980년대 폭력적인 철거 과정을 거치면서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 판자촌이 있던 자리에는 부자와 중산층이 살아가는 아파트가 세워졌다. 판자촌 주민들은 대부분 그 아파트에 입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판자촌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판자촌이 철거된 후 가난한 사람들은 영구임대주택, 비닐하우스촌,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 쪽방 등으로 흩어졌다. 책은 이 과정을 자세히 살피고, 판자촌 이후의 판자촌인 여러 형태의 집들의 역사도 살핀다. “일가족이 가난으로 스러져도, 아동학대와 방임이 있어도 철문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역동적이었던 동네는 이제 가난이 숨겨진 집들로 흩어진 것입니다. 가난이 사는 집은 그렇게 모양을 달리하며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나쁜 조건에서 말입니다.”(8쪽)


판자촌 철거의 역사,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판자촌 철거의 역사는 도심 재개발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전이나 대구 규모의 초대도시로 구상한 도시’인 광주대단지 개발, 시민아파트 건설, 합동재개발사업, 뉴타운사업 등 책에는 도심 재개발의 역사가 자세히 담겨 있다. 대규모로 재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집을 잃고 다른 곳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시민아파트 등 그들을 위해 짓는다는 집에 그들은 결코 들어가 살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또 다른 나쁜 주거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 시절 진행됐던 합동재개발사업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합동재개발사업은 주민(가옥주)과 건설업체가 각각 조합원과 참여 조합원이 되어 ‘합동’으로 재개발사업을 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합동재개발사업은 1983년 시범사업을 시작한 이후 빠른 속도로 서울 전역의 판자촌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합동재개발사업의 충격은 컸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서울 시민의 10% 이상이 거주하던 판자촌이 10년 만에 2~3%가 사는 곳으로 줄어들었다. 줄잡아 70만 명 이상이 판자촌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영구임대주택,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쪽방 등이 판자촌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더군다나 이 연쇄 이동으로 다세대·다가구주택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사람들마저 임대료 인상의 폭탄을 맞았다. 판자촌 주민의 관점에서 보면 합동재개발사업은 자신들의 주거지를 상위계층에게 제공하는 사업일 뿐이었다. 즉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사업이었다. 특히 판자촌 세입자들을 위한 대책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잔혹했다.


합동재개발사업은 한국사회에 나쁜 선례를 많이 만들었다. 용적률 증가에 따른 개발이익을 사유재산처럼 소유자가 독식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정부는 도시 개선을 위해 재정이나 자원을 투입하지 않아도 될 명분을 얻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그저 개발 규제만 완화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시장 중심 규제완화론이 재개발, 재건축의 원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도시 재개발 논리는 부동산 시장을 더욱 양극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시에서 살기 어렵게 만들었다.


철거에 맞서 싸운 주민들


책은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철거민들의 저항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부는 집을 철거하기 전에 다른 곳에 살 자리를 제공한다는 원칙은 가지고 있었다. 시 외곽에 집단정착지를 만들었고, 광주대단지는 그중 신도시급 대규모 정착지였다. 시민아파트도 판자촌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입주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이 주민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광주대단지는 수도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은 황무지에 불과했고, 시민아파트는 생활 형편에 비해 입주금이 너무 비쌌다. 더군다나 세입자들이나 후발 전입자들은 대상이 아닐 때도 많았다. 결국 1971년 광주대단지에서 참다못한 주민들이 들고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철거 싸움은 대부분 일회성에 그쳤다. 대신 체념하거나 또는 분을 못 이겨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직적인 철거민운동이 시작된 건 1983년부터였다. 1983년 목동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목동 주민들의 대응은 1970년대의 철거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조직화되고 체계적이었으며,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전까지 이뤄졌던 ‘한차례 들고일어나는’ 수준의 철거 반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100여 차례가 넘는 집회, 시위를 거치면서 약 2년간 계속되었다. 특히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가두점거 농성이나 구청 진입, 경찰서 앞 시위 등이 수시로 벌어졌다. 이후 철거민 싸움은 사당동, 상계동, 돈암동, 오금동, 구로동 등 100여 곳이 넘는 곳으로 확대되었다. 초기에는 학생운동권이나 종교계 등의 도움을 통해 조직화되기도 했지만, 차츰 주민들이 스스로 연합조직을 만들고 이끌어갔다. 1987년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를 시작으로 1990년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주거연합) 등이 이런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책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싸웠던 제정구, 정일우, 허병섭, 고광석, 김흥겸 등 빈민운동가들도 조명하고 있다. 저자 또한 이 당시 철거민운동에 함께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도시는 가능할까?


판자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싼 집이 필요한 사람들은 존재한다. 저자는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싸고, 좋은 집’을 우리 사회가 갖춰야 하며, 더 좋은 조건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나지 않는 개발 정책이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도시재정비의 개발이익은 소유자뿐 아니라, 거기서 살아가는 가난한 계층, 나아가 도시 전체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야 여러 소득계층, 여러 연령층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도시가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좋은 집에서 살 수는 없다. 그래도 최대한 모두 싸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좋은 동네에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동네든 안전하고 쾌적하며, 편리한 생활시설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도시에 부자나 중산층들만 살 수 없다. 도시는 여러 소득계층, 여러 연령층, 여러 직업군이 함께 살고, 만들어가는 공간이다.”(305쪽) 무엇보다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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