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간절한 기도
모두의 가슴에 잔잔한 위로가 되어 흐르다
등단 50주년 맞은 한국 서정시의 거장 정호승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과 따뜻함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열렬하고도 꾸준한 사랑을 받는 정호승 시인의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당신을 찾아서』(창비 2020)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열네번째 시집으로, 올해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더욱 뜻깊다. 펴내는 시집마다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될 만큼 시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시인의 입지는 확고하다. 이는 깊은 고뇌와 심오한 성찰을 모두의 가슴에 와닿는 평이한 시어로 풀어내는 한결같이 다정한 목소리 덕분이다. 외로움과 상처를 근간으로 보편적 실존에 이르는 고결한 시 세계는 이번 시집에도 여전하지만, 그 깨달음으로 독자를 이끄는 길은 한층 다채롭고 아름답고 따뜻해졌다.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이 시편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은 결사적이여야 한다”(시인의 말)는 시인의 태도 덕분이다. 반세기 이상 시를 쓰면서도 시인이 이 태도를 잃지 않았기에 우리는 각박한 이 세상을 사는 와중에 정호승의 시라는 한줄기 위로를 만끽할 수 있다.
사랑하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
비워내는 마음에 관한 시편들
문학평론가 이성혁이 해설 서두에서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사유하는 것, 다시 말해 죽는 법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정호승 시인의 시적 윤리다”라고 말한 대로 이번 시집에는 ‘죽음’에 대한 사유가 유독 돋보인다. 시인은 첫 시의 첫 구절을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책임을 진다는 것이다”(「낙과(落果)」)라는 아포리즘으로 시작한다. “죽고 싶을 때가 가장 살고 싶을 때이므로/꽃이 질 때 나는 가장 아름답다”(「매화불(梅花佛)」)라고까지 한다. 그렇다고 시인이 죽음을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흙탕물이 죽음을 의미하는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모를 키우는 생명의 물이듯(「흙탕물」),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근원으로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이 시집 도처에 편재한 죽음 이면에서 삶이 꿈틀대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죽음은 사회적인 수많은 비극과도 맞닿아 있는데(「지금 이 순간에도」 「구급차 운전사가 바라본 새벽별」 등) 분노와 절망 가운데서도 이 시집은 한바탕 ‘씻김굿’ 같은 정화의 체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시인이 보기에 우리 인생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모닥불」).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증오에 휩싸이고 그로 인한 번민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항상 괴롭다. 시인이 찾은 한가지 답은 ‘비움’이다. 시인은 “빈 의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의자”(「빈 의자」)이고, “빈 물통은 물이 가득 차도 빈 물통”(「빈 물통」)이며, “빈집은 빈집이므로 아름답다”(「빈집」)라고 말한다. 즉 원래 우리의 마음은 비어 있는 상태이므로, 본연의 상태를 유지해야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다는 뜻이겠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그 무엇도 두렵지 않으므로”(「독배」) 삶의 고통과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더이상 발버둥 치지 않겠”(「발버둥」)노라 다짐해보자는 것이다. 그러한 모티프로 바람에 몸을 내맡겨 어디로든 떠다니는 ‘새’나, 항상 나누는 삶을 살았던 ‘성 프란치스코’의 비유가 시집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다.
시집 중간중간 담담한 어조로 적어 내려간 시인의 일화들 또한 무척 감동적이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눈시울이 달아오르는데, 임종을 지키지 못한 회한(「어머니에 대한 후회」)이나 나를 꾸짖을 어머니가 없음을 서럽게 깨닫는 장면(「회초리꽃」)은 다가오는 가을, 독자들의 마음을 한발짝 가족 곁으로 이끈다.
사라질 때까지 사랑하라
정호승이라는 한국문학의 자랑
지난 8월 22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시로 직접 소개한 바 있다. 이 시에는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밝고 눈이 부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또한 슬픔과 죽음이 있어야 기쁨과 생명이 찬란하다는 시인의 핵심 사상을 품고 있는 대목이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서 이러한 사유는 한발 더 나아간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지금 이 순간에도」)을 믿는다면, “사라질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일몰」)을 수 있다고. 또한 박준 시인은 “외로움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다정했고 고독을 말할 때 그는 단호했습니다”(추천사)라며 정호승 시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정한 외로움과 단호한 고독이 배어 있어서, 이번 시집 역시 많은 이들의 가슴에 더욱 깊숙하게 스며든다. 외로움이 가득한 시절은 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택배」) 인생의 황혼 녘에 이르렀지만, 시인이 “시를 쓰는 고통”(시인의 말)마저 기쁨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한결같이 순결한 시심을 끊임없이 자아올릴 것임을 의심할 나위는 없다. 그리하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뭇 존재를 향한 연민의 마음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물이라도 한잔」한국)하는 지극한 사랑으로 ‘눈물’의 시를 써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등단 50년을 기념하는 이번 시집은 어떠한 대단원의 완성이거나 기념비라기보다는 정호승이 거쳐 지나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이다. 그리고 이 정거장 역시 오래도록 굳건히 남아 한국문학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될 것이다.
차례
제1부
낙과(落果)
빈 의자
낙곡(落穀)
빈 물통
모과
탐매(探梅)
매화 구경
부처꽃
꽃을 따르라
매화불(梅花佛)
택배
마음이 가난해지면
무심(無心)에 대하여
낙수(落水)
흙탕물
소금
구근을 심으며
죽순을 먹으며
눈길 걷는 법
폭풍 전야
고요를 찾아서
김밥을 먹으며
그리운 서울역
제2부
가슴이 슬프다
실연(失戀)
혈서(血書)
성소(聖召)
새는 언제나 옳다
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뒷모습
눈사람
모닥불
제야(除夜)
헌화(獻花)
별똥별
별의 꿈
이상(李箱)의 집
낙석(落石)
낙심(落心)
천사의 메모
천사의 말
프란치스코의 집
나에게 하는 질문
타종(打鐘)
대못
뒷골목
제3부
어제를 기다리며
찻잔을 들고
독배(毒杯)
낙법(落法)
당신을 찾아갔을 때
만리포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그물
모자의 생각
봉쇄수도원
희생양
조종(弔鐘)을 울리며
속수무책으로
나는 납치되었다
실패에 대하여
자살 혹은 타살
가까스로
하룻밤
약속할 수 없는 약속
헌신짝
집을 떠나며
구름이 많다
나의 눈사람
제4부
녹명(鹿鳴)
문신(文身)
진흙
회초리꽃
걸레의 마음
어머니에 대한 후회
아버지의 기저귀
새에게 묻다
전당포
가면
쥐구멍
나무에 대한 책임
짜장면의 힘
시간의 의자
바보
바보가 바보에게
바보가 되기 위하여
은신처
족쇄
시간의 뿌리
도끼에게
탈출
마음이 없다
제5부
눈길
태풍
해 질 무렵
빈집
단체 사진
마지막 순간
구급차 운전사가 바라본 새벽별
무꽃이 지기 전에
물이라도 한잔
임의동행
부르심
시시각각(時時刻刻)
일몰
수의(壽衣)
마지막 순간
발버둥
관 뚜껑에 대하여
마침기도
당신의 눈물
용서에 관한 단상
마지막 기도
나의 소원
새해의 기도
해설|이성혁
시인의 말
책 속으로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낙과(落果)」 전문
봄날에 피는 꽃을 따르지 말고
봄날에 지는 꽃을 따르라
벚꽃을 보라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꽃잎에
봄의 슬픔마저 찬란하지 않으냐
(…)
사람은 지는 꽃을 따를 때
가장 아름답다
―「꽃을 따르라」 부분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택배」 전문
강가의 모닥불 위에 함박눈이 내린다
하늘의 함박눈이 모닥불 위에 내린다
모닥불은 함박눈을 태우지 않고 스스로 꺼진다
함박눈은 모닥불에 녹지 않고 스스로 녹는다
나는 떠날 시간이 되어 스스로 떠난다
시간도 인간의 모든 시간을 스스로 멈춘다
이제 오는 자는 오는 곳이 없고
가는 자는 가는 곳이 없다
인생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
―「모닥불」 전문
천사도 인간을 증오할 때가 있다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고 끊임없이
서로 죽이는 것을 보면
우크라이나 어린이들까지 무참히 죽이는 것을 보면
천사도 인간을 닮아
증오심이 가득한 천사의 마음을 지닐 때가 있다
인간을 위한 천사이기를 포기하고
인간을 위해 결코 울지 않을 때가 있다
―「천사의 메모」 전문
해는 지고 노을 속으로 새 한마리 날아간다
나는 사라질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몰의 순간에 굳이 일출의 순간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몰의 아름다움이 없으면
일출의 아름다움 또한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생에 단 한번 일몰의 아름다움을 위해 두 팔을 벌린다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는 일몰의 순간은 찬란하다
결국 모든 인간이 아름다운 까닭은
일몰의 순간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일몰」 부분
파르르 분노에 떨며 주먹이 칼이 되던
모든 순간은 꽃이 되기를
절망의 벽을 내리치며
벽과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려
잠 못 이루던 순간은 모두 바람이 되기를
시궁창 바닥 같은 내 혀끝에 고여 있던
모든 증오와 보복의 말들은 함박눈이 되기를
(…)
다시 봄이 오지 않아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용서에도
붉은 진달래가 피어나기를
―「마지막 기도」 부분
추천사
언젠가 시인은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에 대해 저에게 일러준 적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 소외로 생기는 것이고 고독은 내가 나를 스스로 소외시킬 때 생기는 것이라고. 외로움에 관해 말할 때 그는 다정했고 고독을 말할 때 그는 단호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시인의 시는 늘 다정과 단호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시인은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고 끝없이 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고요. 이런 시인의 시간을 기다림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더 잘 기다리는 사람
이 되기 위하여 온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든, 시가 아니든.
박준 시인
시인의 말
50년 동안이나 이 험난한 세월을 시를 쓰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디에서 삶의 가치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아직 이 세상에 나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시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절대자에게 먼저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그리고 시를 쓰는 고통을 끊임없이 견디고 꾸준히 시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온 나 자신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일은 외롭고 배고픈 일이다. 그렇지만 시를 떠나 살 수 없는 게 지금까지 내 삶의 현실이자 본질이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내 시의 스승은 현실이다. 이 비극의 시대를 살아온 고통의 현실이 바로 내 시의 스승이다. 나는 시를 통해 나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내가 살아온 이 시대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
썩어가는 모과향은 모과의 영혼의 향기다. 내 육신은 늙어가도 내 영혼만은 시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해본다. 시를 향한 내 마음만은 50년 전 처음 등단했을 때 그 청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2022년 가을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