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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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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겨운 입심과 날렵한 필치, 정교한 구성으로 ‘성석제식 문체’를 일궈가는 중견소설가 성석제씨의 새 소설집은 제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포함, 2년여 동안 발표한 일곱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세상의 공식적인 길에서 한치 비껴난 예외적인 인물들의 생에 주목함으로써 기성의 통념과 가치를 돌아보는 독특한 감동을 선사한다.

작가는 현실에 널린 대상을 포착해 그것을 묘사하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니라, 현실의 세목을 하나하나 수집하고 분해한 뒤 거대한 거짓말의 세계로 끌어들여 정교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소설문법을 유쾌하게 뒤집어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예외적 인물들, “순수한 개성”의 소유자들로 해서 그의 소설은 “국가•계급•계층•가문 등 전체성적 의미항을 중시하는 우리의 오랜 소설전통과, 나아가서는 한국사회와 근본적으로 맞서 있다”(정호웅)는 평가를 낳게 되는 것이다.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모든 면에서 평균치에 못 미치는 농부 황만근의 일생을 묘비명의 형식을 삽입해 서술한 단편이다. 남의 비웃음과 모멸을 거리끼지 않고 평생 자신의 일을 다하며 이웃을 돌보다 갑작스런 사고사를 당한 황만근의 일생이, 그의 진면모를 알아본 한 외지인의 기림 속에 온전히 살아나면서 그 “이타의, 수분(守分)의”(정호웅) 행적을 되새기게 한다. 황만근은 과연 무엇이라 말했는가? 그는 작중 어디에서도 아무 특별한 메시지를 남기지 않지만(“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카이”가 그나마 제대로 된 발언이다) 그 때문에 말없이 도리를 다한 생애는 욕망과 이기심으로 뭉친 삶을 되비추는 독특한 거울이 된다.

한 친목계 모임에서 우연히 벌어진 조직폭력배들과의 한판 싸움을 그린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은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해학과 야유가 전편에 깔린 작품이다. 사기, 간통 등의 소소한 전과를 가진 지역사회의 보잘것없는 일원들의 모임인 이 ‘상호친목계’(한번 계원이 되면 상호간에 평생 친구가 되어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는 계’의 준말이다)는 그대로 현실세계의 축도이다. 이들의 크고작은 이권싸움과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파렴치하고 비겁한 이력은 그 자체로 흥미롭게 부조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작품의 끝부분에 돌연 등장한 ‘진짜 깡패’들과의 일전(一戰)은 이 세계가 ‘진짜 이전투구’의 장임을 생동감있게 폭로하는 장치이다. 이 “지리멸렬의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의 몰합리적이고 폭력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속성”(정호웅)과 그에 대한 맹목적 복종, 한여름 땡볕 속에 벌어진 이유 없고 우연한 싸움의 아수라를 아연한 활기와 환호성으로 버무려 그려낸 작가의 솜씨가 빛을 발한다.

‘목욕하는 여인(들)’ ‘바느질하는 여인’ ‘파라솔을 쓴 소녀’ 등 르누아르(P.-A. Renoir)의 작품들을 소제목으로 삼은 특이한 구성을 취한 「욕탕의 여인들」은 돈많은 과부와 결혼해 잘살아보려던 한 입주과외 대학생이 차례로 유복한 집안의 여성들을 만나 겪는 일을 그린다. 얄팍한 욕심과 변변치 못한 이력의 소유자가 미모의 돈많은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른 세계’로 진입해보려다 ‘주제를 파악하고’ 안착하는 과정이 주인공의 허위의식과 적당한 순정주의를 기조로 경쾌하게 이어진다. 누구나 한번쯤 품어봄직한 얄팍한 계산속과 이기주의가 막강한 현실과 부딪혀 낳는 결과를 해학과 페이소스에 실어 보여줌으로써 한편으로는 개인을 얽어매는 이 세계의 완강한 질서를, 한편으로는 허위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낸다.

세상의 경계선상을 떠도는 ‘괴(怪)’한 인물들의 모습은 이번 소설집에서 여러 형태로 드러난다. 집의 부피를 초과할 만큼 책 수집에 탐닉해온 「책」의 주인공 당숙, 온갖 불운의 한가운데만을 걸으면서도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천애윤락]의 동환,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천하제일의 미남으로 자라고 향기로써 보는이의 영혼을 사로잡는 [천하제일 남가이]의 반평생, 첫판의 도박은 종류를 불문하고 이기고 마는 [꽃의 피, 피의 꽃]의 주인공 ‘나’가 그런 이들이다. 이들이 가진 독특한 습성과 괴벽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들은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법한 개연성을 부여받아 생동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편으로 설화적•전기적 요소를 십분 활용하는 치밀한 구성과, 대상과 상황의 미묘한 기미를 놓침없이 날렵하게 짚어내는 문장들에 힘입은 것이다.

이번 소설집은 그간 남다른 문체와 소재로 우리 소설에 유례없는 활기를 불어넣어온 성석제의 작품세계가 한층 무르익은 가운데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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