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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의 미친 여자들

여성 잔혹사에 맞선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 열전

Description:...

■ 책 소개

조선의 ‘언니들’, 남자들이 금지한 세계로 진격하다

“생존을 위한 분투를 통해 자신, 나아가 타자와 세계를 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_권김현영(여성학자)

“현대 여성 영웅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는 책”_박서련(작가)

이 전자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KPIPA)의 <2023년 전자책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입니다.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붐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여성서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흐름을 타고 나온〈스트릿 우먼 파이터〉〈술꾼 도시 여자들〉〈닥터 차정숙〉 등은 새로운 여성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멋지고 당당한 ‘언니들’은 현대물에만 있을까? 우리의 전통에서 이런 ‘언니들’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장르문학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가려진 여성의 삶에 주목해 온 전혜진 작가는, 이 책에서 낡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을 재조명한다. 태초의 여성 신화 〈바리데기〉부터 ‘정상가족’에 도전한 《방한림전》까지, 다양한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은 때론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때론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렇듯 멋진 ‘언니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은 다양한 여성서사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낯익고도 새로운 여성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시작되는 ‘여성 잔혹사’

영웅의 ‘웅’이 수컷을 뜻하는 말이란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기존의 영웅 이야기는 “강철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이상화된 남성”들의 활약으로 가득한 남성 중심의 서사다. 따라서 전형적인 영웅상에서 탈피한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남성 영웅의 이야기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외부의 적에 맞서 용감하게 나서는 것이 남성 영웅의 서사였다면 여성의 곤경은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가족 안에서 시작된다.”(여성학자 권김현영)

우리의 여성 주인공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여성 잔혹사’에 맞서 생존을 위한 분투를 벌이면서 영웅으로 거듭난다. 따라서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단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특별한 능력을 갖춘 한 여성의 성공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과 제약에 맞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들,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 영웅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걸림돌은 아버지라는 ‘숙명적 비극’이다. 여성 영웅의 아버지들은 대개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딸에게 큰 관심이 없기에 딸의 시련을 방관하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딸을 버리는 〈바리데기〉처럼 비극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전》은 사악한 계모가 전처소생의 딸을 구박하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기억되지만, 사실 두 소설에서 딸에게 정말 위협적인 존재는 ‘사악한 계모’가 아니라 ‘무관심한 아버지’다. 소설 속 가부장들은 한정된 재산이나 집안의 기득권을 두고 계모와 전처소생의 딸 사이에 생긴 갈등을, 자신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집안일’로만 여겨 방관했다. 두 아버지는 장화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자 딸을 살해하는 것을 묵인하고, 팥쥐가 콩쥐를 살해하고 감사 부인 행세를 하느라 집에 없는데도 딸을 찾지 않는다. 이렇듯 딸의 고난에 무관심했던 아버지들, 그리고 아버지들의 무관심을 용인한 당대 사회가 딸들의 비극을 낳았다.

성장한 여성 주인공들은 이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을 만난다. 《숙영낭자전》의 주인공은 원래 하늘의 선녀로 지상에 귀양을 왔지만, 시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혼을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녀는 결혼한 뒤 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해 별당에 머무르고, 여기서 비롯된 오해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누명을 쓰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자결한다. 《숙영낭자전》은 “설령 하늘의 선녀라 해도 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시집살이란 죽기만큼 힘든 것”이라는 당대 여성들의 수난을 보여준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어도 조선의 며느리들이 마주친 현실은 대개 가혹했다. 고단한 시집살이를 소재로 한 부요(부녀자들이 부른 민요)를 보면, 시부모와 시누이를 모시느라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두 방에 자리 걷”(〈시집살이 노래〉, 경북 경산 지방)는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격려는커녕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며느리들의 수난은 “똑같이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왔지만 남자들이 TV를 보는 사이 여자들은 제사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과 같은 미묘한 형태의 차별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부장제를 교란하고 전복하는 상상력

그러나 우리의 여성 주인공들은 가부장제가 설치한 장애물들에 가로막혀 좌절하는 대신 당당히 맞서 싸우는 쪽을 선택한다.

《운영전》의 주인공 운영이 꺼내든 무기는 사랑이다. 성리학적 질서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압하던 시대에 그녀는 자유로운 사랑을 꿈꾼다. 권력자의 소유물로 여겨져 다른 남자와의 사랑이 철저하게 금지된 궁녀였지만, 궁녀 운영이 아니라 인간 운영으로서 살기 위해 김 진사와의 사랑에 목숨을 건다. 둘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안평대군의 수성궁이 몰락한 뒤에도 두 사람이 때때로 그곳에서 사랑을 속삭인다는 결말은 “마침내는 사랑이, 인간됨이 엄혹한 권력을 이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늘 부딪히는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 남장을 한 뒤, 공을 세워 입신양명하는 여성 영웅들도 있다. 《홍계월전》과 《이학사전》의 두 주인공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무예나 군사 면에서도 남자들을 압도하는 능력을 발휘해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높은 벼슬을 얻는다.

이런 이야기는 때론 여성 영웅들이 생물학적 성별만 다른 ‘명예남성’이 되어 가부장제에 편입되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박씨전》도 그렇다. 처음에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남편에게 무시당하던 박씨는 시아버지와 국왕이라는 두 가부장의 권위에 힘입어 마침내 가문에서 인정받는다. 또한 박씨는 남편이 밖에서 국왕을 모시는 동안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여성 가장’이며, 소설에서 박씨의 아버지는 등장하지만 박씨의 어머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박씨는 “남성의 세계에 받아들여진 여성, 명예남성이자 ‘아버지의 딸’이다.” 이런 점에서 박씨는 얼핏 보기에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제의 일부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만 해석하기에는 《박씨전》의 서사가 단순하지 않다. 《박씨전》에서 박씨의 대척점에 선 인물은 적국의 왕이 아닌 그 아내, 호귀비다. 그리고 박씨와 호귀비는 각각 계화와 기홍대라는 유능한 ‘여성’ 후계자를 길러낸다. 남성 영웅을 대체하는 단 한 명의 탁월한 여성 영웅이 아니라 그를 적대하는 다른 여성 영웅과 그들의 제자 등 다양한 여성 영웅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박씨전》은 남성 영웅을 대체한 명예남성의 성공담이 아니라 ‘명예남성이길 거부한 여성 영웅들의 계보’를 다룬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방한림전》은 오늘날에도 논쟁적인 동성혼이라는 소재를 통해, 가부장제를 전복하는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방관주는 어릴 때부터 남장하고 사회에 진출해 열두 살에 장원급제하는데, “여자는 모든 일을 제 뜻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불만 때문에 비혼을 선언했던 영혜빙은 방관주와 함께라면 평등한 결혼생활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해 결혼을 결심한다. 부부가 된 둘은 입양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굳건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쉽지 않은 대안가족의 꿈을,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앞질러 실현한 것이다.

우리가 ‘규방의 미친 여자들’이다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은 가문과 국가라는 이름의 가부장제였다. 《이학사전》의 주인공 이현경은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외적은 쉽게 물리치지만, ‘여자답게 결혼해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가부장제의 압력은 이기지 못한다. 황제의 주선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한 뒤에는 시어머니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벼슬이 더 높은데도 남편에 대한 굴종을 강요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무기력하게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가부장제가 금지한 세계로 당당히 진격한다. 사랑으로 낡은 세계에 균열을 내고, 담장 밖의 세계로 나아가 여성의 몸으로 장수가 되며, 정상가족에 도전하는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날의 여성들도 ‘좋은 며느리’에게 요구되는 임출육(임신‧출산‧육아)과 가사노동의 높은 기준, 그에 따른 경력 단절 등 여성에게만 유난히 무거운 짐들에 맞서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매일 분투를 벌인다. 그렇게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쟁취하려 했던 ‘규방의 미친 여자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담장 안에서 끊임없이 세계와 불화하며 2023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된다.

■ 추천사

이 책은 남성 영웅 못지않은 여성 영웅에 대한 책이 아니다. 영웅 신화의 이야기 구조 자체가 남성 중심의 서사였다는 것을 밝히는 동시에 여성 영웅에게 맞는 새로운 서사 구조를 제안하는 책이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외부의 적에 맞서 용감하게 나서는 것이 남성 영웅의 서사였다면 여성의 곤경은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가족 안에서 시작된다.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가족과 국가 그 자체이며 이런 조건에서 여성은 영웅이 될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여성의 생존을 위한 분투 자체를 영웅적 서사로 재배치한다.

바리데기는 여자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으나 스스로를 구원하고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린 뒤 스스로 신이 되었다. 이 이야기만큼 신화라는 이름에 걸맞은 서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이처럼 생존을 위한 분투를 통해 자신, 나아가 타자와 세계를 구하는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_권김현영(여성학자,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여자들의 사회》 저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던 옛사람의 말을 따라 묻는다, 영웅이 되는 데에 성별이 따로 있겠는가?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의 겹겹을 되짚으며, 낯설고 새로운 고전의 핵심을 묘파하며 전혜진은 답한다. “여성 영웅이라 오히려 좋아!”

탄생과 소명의 부여, 역경과 고난에 이어 마침내 소명 달성에 이르는 영웅담 여정에서,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놓은 수많은 함정까지 돌파해 낸다. 다양한 형식과 문법을 구사하며 독자들을 사로잡은 글꾼 전혜진은 장르를 횡행하는 힘센 상상력으로 이야기 속 영웅들을 이끌어 독자 앞에 세운다.

낡고 고루한 이야기라고만 여겼던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할까. 현대 여성 영웅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는 이 책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_박서련(작가, 《체공녀 강주룡》 《나, 나, 마들렌》 저자)

■ 책 속에서

당대의 사람들에게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꿈꾸게 했을, 신분과 성별을 비롯해 자신을 제약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고 시련을 견디며 자신의 진짜 모습들을 찾아가는 여성 인물들의 전통은, 어쩌면 읽고 쓰는 사람들의 눈과 손을 통해 계속 이어져, 지금의 여성 작가들과 여성 독자들이 쓰고 읽으며 만나는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영웅들의 계보일지도 모른다고, 이 책에 언급한 옛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나가다가 때때로 생각했다.

한때는 버림받은 딸들이었고, 자라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작게는 가문 크게는 국가라는 이름의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때로는 나라를 구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구하며, 때로는 다른 여성을 위험에서 구해내는 이들,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들이자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이며 어머니이자 딸이고 자매들인 이들, 사회적 약자이자 타자이며 때로는 모험을 떠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이들이 바로 옛이야기 속 여성 영웅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처 입은 어린이나 버림받은 딸, 사회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계속되는 차별을 겪으며 소외되었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한편, 이들의 영웅적인 여정에서 또 다른 용기를 얻는 것이다. …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거나 세상의 끝을 향해 모험을 떠나지 않아도, 이들의 도전과 반란은 타자화된 별종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 자체로 또 다른 영웅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만약 《장화홍련전》에서 아들인 장쇠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기 위해 위의 두 딸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이 계모 허씨가 아니라 배 좌수였다면 장화와 홍련은 원귀가 되어 돌아올 수조차 없었다. … 가족 안에서의 학대에 대해 피해자들이 합법적으로 원망하거나 복수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가족이지만 온전한 가족이 아니고 부모이지만 혈연이 아닌 돌출된 존재인 계모뿐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차별이나 학대를 받는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사고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죄를 계모에게 부당하게 뒤집어씌운 채, 현실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학대를 못 본 척하기도 했다. 과거는 물론 현대에도, 《장화홍련전》이나 《콩쥐팥쥐전》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 의붓어머니에게 주인공이 학대당하는 홈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겪는 비극과 계모의 악행에만 집중할 뿐, 아버지의 묵인이나 무관심은 쉽게 지나친다.

결국 마지막에 사정옥은 유연수와 재회해 다시 유씨 집안의 부인이 되고, 아들인 인아와 재회하고, 시가와 친정 양쪽의 이름을 드높이지만, 그곳에 사정옥이라는 개인은 없다. 가부장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인인 사정옥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유연수와 유씨 가문을 위해 맞추어져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자아나 욕망은 아예 말살된 것처럼 보인다. 남성 사대부 작가가 당대의 정치를 비판하려고 썼던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가부장제가 부덕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여성의 인격을 말살하는지, 가부장제의 이상에 최적화된 여성이라도 남성의 변덕에 의해 내쳐질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과 그를 가로막는 권력자란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 있는 소재이며, 안생의 아내는 남편에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은 열녀였다. 하지만 이를 기록한 사대부들은 안생의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간 하성부원군의 무도한 폭거를 비난하지 않는다. 사대부의 관점에서 노비는 물건이나 다름없고, 양반이 제 소유물인 노비에 대해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도, 안생이 권력자인 부원군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 한낱 여성 노비의 절개를 칭송하기 위해 권력자인 부원군의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비난할 수 없었던 당대 남성 사대부들은, 안생의 아내를 남편 앞에서 서러운 눈물만을 흘리고 조용히 사라질 뿐 가해자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가해자가 원하는 ‘피해자다운 피해자’로 만들어버렸다.

《박씨전》에서 박씨의 대척점에 선 인물은 후금의 지배자 호왕이 아닌 그 아내, 호귀비다. 호귀비 역시 박씨와 마찬가지로 천문과 지리에 능한 영웅이고, 후금의 승리는 호귀비의 전략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은 평범한 계집종이었으나 박씨의 시녀가 되어 그 가르침을 받고 용율대와 맞서 싸우는 계화나, 호귀비의 측근으로 검술 솜씨가 뛰어나 조선에 자객으로 오게 되는 기홍대와 같이 자신의 뒤를 이을 유능한 여성 인물을 길러낸다. 그들의 후계자는 아들이나 소년이 아닌, 자신보다 어린 여성이다. … 《박씨전》은 한 사람의 뛰어나고 완벽한, 그래서 남성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성 인물을 유일한 주인공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적대 관계에 놓인 여성 영웅, 여성 스승과 여성 제자의 관계 등을 다양하게 보여주며 여성 영웅들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직접 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이들에게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남성이란, SF 장르에서의 슈퍼로봇과 같다. … 《박씨전》에서 박씨와 호귀비는 각각 여성의 옷을 입고 내당과 구중궁궐에 앉아, 이시백과 호왕이라는 남성을 조종해 서로 맞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조선시대에 현실적으로 여성이 사회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당시 소설을 짓고 전파하며 향유하던 사람들은 이들 비범한 여성 영웅들에게 유능한 남성 대리인을 내세우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장을 한 여성들은 남성 대리인을 슈퍼로봇처럼 ‘조종해’ 현실에 영향을 끼친 주인공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들은 영웅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여자로 태어나, 시대의 한계로 남자의 옷을 SF 장르의 강화복처럼 ‘입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자신을 ‘위장’한 뒤 세상에 나온다. 이들에게 남성의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마법소녀나 슈퍼 히어로의 수트와 같다. 이들이 남성의 옷을 입은 동안에는, 사람들은 이 영웅이 실은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야기 속에서야 선녀나 용왕의 딸 등 신비롭고 고귀한 여성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 여성 영웅이 되고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여성은 기본적으로 신선이나 이인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도 이들 여성 주인공들은 사회로 나아가려면 남장을 해야 하고, 과거 시험을 보면 장원급제를 해야 하고, 《박씨전》의 박씨가 도술을 쓰는 것 이상으로 비범한 행적을 보여야만 한다. 이야기 속 다른 남성 인물, 특히 여성 영웅의 배우자가 되는 남성들은 그런 이적을 보이지 않아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지만, 우리의 주인공들은 천문을 보고 앞일을 내다보고, 단기필마로 적을 쓰러뜨리고, 집안에 팔진도를 구축하는 정도의 신이한 행적을 보여야만 태생부터 비천한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 비슷한 정도의 인간 대접이라도 받을 수 있다. … 《홍계월전》은 남성보다 우월하고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닌 홍계월 같은 영웅도 남편과 사회에게 멸시당하는데, 하물며 평범한 보통 여자들이 겪는 현실의 차별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당대의 여성 독자들이 《방한림전》을 통해 여성과 여성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았다면, 현대의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성적인 열정 없이도 서로에게 애정과 그리움을 품고 상냥함과 헌신, 존중과 예의로 서로를 대하며, 입양한 아이를 함께 돌보는,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국가의 인구를 늘리고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을 생산하는 재생산이 아니라, 남성을 가부장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혼인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우정으로 맺어지고 행복과 책임감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한 공동체를 꾸린다는, 당연한 권리로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생활동반자법도 통과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취약한 그 관계를, 조선시대의 소설 《방한림전》은 이미 앞질러 꿈꾸고 있었다.

■ 차례

서문-진짜 ‘나’를 찾아 나선 또 다른 영웅들의 계보

1. 바리, ‘여성 잔혹사’를 전복하다: 〈바리데기〉

‘타자화된 별종’을 넘어 운명의 주체로

지배자들도 숨기지 못한 여성 영웅의 원형

바리의 모험과 영웅의 여정

2. ‘버림받은 딸’을 영웅으로 만드는 세 어머니: 《숙향전》

가부장제에 굴복한 친어머니

보호하고 기르는 수양어머니

이끌어주는 여신 어머니

3. 아버지라는 숙명적 비극

‘자식 사랑’으로 포장된 무능: 《심청전》

사악한 계모보다 무서운 무관심한 아버지: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아버지에겐 자식보다 가문이 더 중요했다

4. 결혼, 여성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다

가부장제가 말살한 여성의 인격: 《사씨남정기》

하늘의 선녀라도 시부모의 인정 없이는: 《숙영낭자전》

며느리 되기를 강요당한 여성들의 조선판 SNS: 부요

틀을 깬 미혼모, 여신이 되다: 〈당금애기〉

5. 사랑으로 낡은 세계에 균열을 내다

운명에 도전한 궁녀의 사랑: 《운영전》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의 혁명: 《춘향전》

6. 당나귀 가죽을 벗는 여성들

다시 태어난 소녀의 인생 2회차 모험: 《금방울전》

명예남성이길 거부한 여성 영웅: 《박씨전》

7. ‘유리 천장’을 뚫기 위해 남자가 된 여성들

가부장제의 혼란이 낳은 여성 영웅: 《홍계월전》

나라를 구했지만 가정은 벗어나지 못한 불완전한 혁명: 《이학사전》

혈연을 뛰어넘은 대안가족을 상상하다: 《방한림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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