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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다는 것

세상에 같은 그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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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구성하는 말의 새로운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십대를 위한 인문학, 너머학교 열린교실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이다.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서 - ‘지도 걸’이 화가가 되기까지


저자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독자들을 ‘그린다는 것’의 세계로 이끈다. 저자는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지 않았다. 주변에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전혀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그저 그림 그리기를 즐겼는데 공책 맨 뒷장을 늘 ‘공주’ 그림으로 채우곤 했다. 좀 더 자라서는 만화책의 세계에 빠져, 학과 공부 틈틈이 만화를 그리면서 창작에 대한 희열을 느꼈고, 국사 시간에 지도를 잘 따라 그려 ‘지도 걸’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그 당시는 화가가 되리라고 예상 못 했지만 그 시절의 즐거웠던 경험은 지금의 작품에까지 이어졌다. 글과 만화가 함께 하는 다양한 작업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가 언제나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미술대학 진학을 준비하면서, ‘일단 면허증을 따고 보자’는 식의 운전면허 시험 준비와 비슷한 입시용 그림 그리기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사서, 맘속에 남아 있던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내던 날부터, 왜,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이고 특별한 풍경, 순식간에 지나가는 ‘빛나는 순간’을 그림으로 오래 남겨 놓고 싶은 바람은 치열한 고민과 다양한 시도와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저자에게 그림은 “세상과 소통하는 중요한 창구”,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도구”가 되었고, 노동이기도 하지만 ‘놀이’이기도 한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다 보면 더 좋아하게 되고, 그려 보면 내 마음을 알게 된다


그린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즐거움이라지만 막상 하얀 종이를 눈앞에 두면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이 된다. 노석미 선생은 “일단 좋아하는 것을 그려 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 고양이, 꽃, 음식, 풍경뿐 아니라 소리, 음악, 냄새 등 눈에 안 보이는 것까지 그려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대상과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친해지게 되는 것이다.


“한번 그림으로 그려 본 대상은 마치 사귀기 전의 친구와 사귀어 보고 난 뒤의 친구만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면,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얼굴을 그리다 보면 ‘어? 어!’ 하고는 몰랐던 혹은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이 경험은 모두에게 일어나니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번 시도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기라는 과정을 통해서 깊이 관찰하게 되기 때문이다.”(46쪽)

그냥 떠오르는 대로 그려 보는 것도 좋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린 그림들에서 멋진 이미지들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렸다지만, 사실 무의식이 작용을 한 것이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란 노랫말처럼 말이다. “무의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그려 보기로 하자. 우연히 뭔가가 나올 수도 있다.”(77쪽)


이 밖에도 저자는 보고 그리기, 그리면서 그리기 등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다는 행위가 지닌 여러 가지 속성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림은 무엇을 그렸건 그리는 주체를 통하여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에 세상에 같은 사람이 없듯이 같은 그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미지를 채집하고, 색깔에 이름 붙이고, 그림과 대화하고


그림 도구를 들고 화폭 앞에 앉아 있을 때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악몽을 꾼 뒤 잠에서 깨어 꿈속의 이미지를 ‘채집’하여 수첩에 기록해 두고, 그 이미지가 주는 특별한 감정을 해석해 보는 것도 그림 그리기의 과정이다. 산책을 하거나 카페에 우두커니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눈에 보이는 혹은 머릿속에 스치는 이미지를 채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색을 고르고, 그 색들이 만나서 일어날 일을 기대하고, 오월의 하늘파랑색, 오래된 낡은 소파주황색, 골목길모퉁이회색 등 이름을 붙여 주는 일도 그림 그리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또한 그림을 그리면서 색다른 경험을 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림은 그리면서 그리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이미지가 말을 걸어서 그리기 시작하고, 붓질을 하면서 또 의도와는 다르게 변해 간다는 것이다. 이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과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여러 사건들을 만날 수도 있다. 목적의식 없이 떠난 여행에서 근사한 경험을 할 때와 비슷하다. 또한 완성된 작품은 스스로 생명을 얻은 완전체가 되어, 그린 사람 자신이나 그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과 예측하지 못한 감상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물론 그림 그리기가 늘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잘 그리기 위해서는 숙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구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수영을 배울 때와 비슷하다. 반복적인 훈련으로 영법을 완전히 몸에 익혀야 자유로이 유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낯선 도구를 익숙한 도구로 바꾸려면 반복적 훈련으로 경험치를 늘려야 한다. 그리고 도구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그 익숙함을 다시 깨기 위해 노력해야 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실패하면 다시 시도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꼭 그림 그리기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건 어느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은 지루하고도 기나긴 시간을 거쳐서 도착한다. 그 가시밭길을 통과하면 환한 빛이 솟구쳐 나오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달콤한 열매가 달린 커다란 나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66쪽)


누구나 누리는 그림 그리기의 행복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지인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아마추어로서의 그림 그리기의 행복에 대해 강조한다. 그 지인은 힘든 일을 겪고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글을 쓰는 틈틈이 정원을 가꾸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그린다’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부담 없이 표현의 욕구를 꺼내어 놓고 그저 연필을 들고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을 묘사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그리기를 위한 재료가 있다. 모래, 돌, 흙, 열매, 물, 나무, 커피 등등. 또한 어디에겐 그림을 그리면 그곳이 화폭이 된다. 종이나 캔버스는 물론, 담벽에도 유리창에도 바닥 돌멩이 나무, 해변의 모래, 손바닥, 당신의 얼굴 어디든 좋다. 세상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폭은 많다. 그리고자 한다면 말이다.”(123쪽)


이렇게 차분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들려주는 노석미 선생의 그린다는 것의 다채로운 과정과 의미들을 생각해 보다 보면, 화가란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평소의 지론과는 약간 거리를 둔 이 책을 쓴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십대들에게, 더 많은 이들에게 그린다는 것이 주는 행복을 함께 누려 보자며 부드럽게 꼬드기기 위함이 아닐까? 좋은 그림을 보고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도 무엇을 그렸는지 어떻게 그렸는지보다 마음을 열고 느껴 보라고 말한다. 마음이 ‘몽실몽실해지는 느낌’을 여러 번 경험하다 보면 자신만의 취향이 생기고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혹은 예술 전반)을 즐기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값진 조언이 아닐 수 없다.


글과 그림의 색다른 결합


노석미 선생은 글과 이미지의 새로운 만남을 꾸준히 시도해 온 작가이다. 그림소설을 연재했고, 그림과 글이 결합된 북 갤러리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해』를 펴냈으며, 짧은 문장과 이미지가 결합된 ‘텍스트 페인팅’ 작품 시리즈를 여러 해 동안 그려 왔다. 『그린다는 것』역시 글과 그림이 아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 다른 무엇이 나오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1+1=2가 아니고 1+1=% 혹은 # 혹은 *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104쪽)라는 말처럼 글이 그림을 설명하거나 그림이 글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글과 그림의 유기적인 결합을 위해 책의 모든 쪽의 그림과 글을 직접 구성하여 제안할 만큼 치밀하게 고민한 노석미 작가의 이 책을 읽으며, 보며 독자들은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너머학교 열린교실 ? 생각교과서 시리즈 열한 번째 책


‘너머학교 열린교실-생각교과서’ 시리즈는 십대 청소년들과 삶을 구성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나누고,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스스로 구성하는 데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다.


첫 번째 책 『생각한다는 것』은 ‘2009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청소년저작발굴 및 출판지원사업 당선작’으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책따세)’의 2010 여름방학 추천도서에 선정되었으며, 2012년 구미시 한도시 한책 운동 선정도서에 이어 2014년 서울도서관 한 도서관 한 책 올해의 한책에 선정되었다. 이어 출간된 『탐구한다는 것』 역시 호응을 받으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2010 제7차 청소년에게 좋은 책’ ‘2010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2011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뽑은 어린이 청소년 책’, 경기도 교육청, 서울시 교육청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 『기록한다는 것』『읽는다는 것』(2011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느낀다는 것』『믿는다는 것』『논다는 것』(2013 경기도 교육청 서울시 교육청 추천도서)『본다는 것』역시 꾸준한 호응을 받은 바 있으며. 강수돌 선생님의 경제 이야기 『잘 산다는 것』(2014 책따세 여름방학 추천도서), 오창익 선생님의 인권 이야기『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이어, 열한 번째 책 『그린다는 것』을 펴냈다.


생각, 탐구, 기록, 느낌, 읽기, 믿음과 놀이, 본다는 것, 잘 산다는 것, 사람답게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 등의 말에 담긴 의미를, 먼저 공부하고 배운 대로 살고 있는 저자들에게 묻고 십대들과 나누자고 했다. 학문 분야로 말하면 과학, 예술비평, 역사, 인권, 고전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 이야기이자 과학자, 역사가, 시민운동가, 평론가, 화가 등으로 살아온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들을 아이들과 나누는 명실상부한 열린 교실이 될 것이다.


시리즈 구성

생각한다는 것 고병권 글 / 탐구한다는 것 남창훈 글 / 기록한다는 것 오항녕 글 / 읽는다는 것 권용선 글 / 느낀다는 것 채운 글 / 믿는다는 것 이찬수 글/ 논다는 것 이명석 글 / 본다는 것 김남시 글 / 잘산다는 것 강수돌 글 / 사람답게 산다는 것 오창익 글 / 그린다는 것 노석미 글

관찰한다는 것(근간) 김성호 글 / 꾸민다는 것(근간) 박사 글 / 말한다는 것(근간) 연규동 글

* 이 시리즈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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