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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Description:...

우린 오늘도 하루치의 슬픔으로 반짝인다

실패 앞에서도 기꺼이 노래할 수 있다는 빛나는 믿음

2012년 “실패를 무릅쓰고 부단히 다채로운 시공간을 창조”해내면서 “감각적인 언어를 수집하고 배치하면서도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의 진폭을 상당히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 ‘제12회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한 안희연 시인의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가 출간되었다. 등단 3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등단 당시 현재보다 미래를 더 기대한다는 믿음에 보답하듯, 한층 세련된 감각적 이미지와 발랄한 상상력을 떠받치는 탄탄한 서정이 유연하게 흐르는 매혹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소멸해가는 세계와 존재의 실상을 섬세한 관찰력으로 투시하면서 삶과 현실의 고통을 노래하며 “한 손에는 미학, 한 손에는 깊이를 포획하고” 있는 이 젊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 우리는 개성적이고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원, 추천사)을 엿본다.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왼쪽으로 세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번째 사람/손목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파트너」 부분)

안희연의 시는 세계의 소멸과 존재의 몰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세계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오롯이 솟아오른다. 시인은 “도처에 말할 수 없는 어둠뿐”(「피아노의 병」)인 불가능성의 세계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의 가치에 대한 통각이 예민해질수록 강렬해지는 무감각과 무력감으로 살아가는 자의 슬픔에 관해 쓴다. 어둠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세계에서 “거의 사라진 사람”(「몽유 산책」)은 어떻게 살아가며 살아가야 하는가. 시인은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접어놓은 페이지」) 신념에 찬 상상과 “나는 내가 한사람이라는 것을 믿는”(「하나 그리고 둘」) 상상의 신념으로 ‘고통스러운 무감각’과 ‘격렬한 무기력’이라는 역설적인 존재 방식을 탐색해나간다.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귀퉁이가 찢긴 아침/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불현듯 돌아보면/흩어지는 것이 있다/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땅속에 박힌 기차들/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어항을 뒤집어쓴 채(「몽유 산책」 전문)

존재의 운명과 글쓰기의 운명이 같은 지평에 있음을 인식하는 시인에게 존재의 혼돈이 극대화되는 곳은 “흰 종이의 침묵”(「뮤트」)이 흐르는 ‘백색 공간’이다. ‘침묵’이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이 글쓰기의 공간은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글자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이곳이/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곳이며, 오히려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되는 곳이다. “온몸이 뒤틀린 나무가 온몸을 비틀며 자라고” “침묵이 고이면 얼마나 깊은 두 눈을 갖게 되는지”(「백색 공간」) 감지할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시인은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고 “이제 나는 목이 부러지는 높이를 아는 사람”(「화산섬」)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에 이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한참을/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밤/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일초에 하나씩/새로운 옆을 만든다(「백색 공간」 부분)

슬픔이 끼어드는 ‘옆’에 놓일 첫 시집

불확실한 삶의 정황 속에서 암시와 상징의 언어를 통해 벌이는 시인의 시적 고투는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입체 안경」), “바닥으로부터 다시 몸을 일으”켜 “단 한순간이라도 나의 최대치가 되어보는 일”(「러시안룰렛」)로 집약되면서 “너의 슬픔이 끼어들”(「파트너」) 수 있는 ‘옆’을 발견하는 일에 몰입한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시편들은 시인을 고통스럽게 추동하는 ‘옆’의 윤리학을 보여준다.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옆’을 이루고, 시인은 “까맣게 까맣게 흐느”끼면서 “눈에다 못을 박아넣고 싶은 날들”(「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을 보낸다.

책을 열면 죽음이 쏟아진다 맨발로 맨몸으로 달려나오는 아이들/나는 황급히 책을 덮고/변명처럼 천장을 올려다본다//거꾸로 매달린 아이들이 나를 보며 수줍게 웃는다//열매처럼//새파랗게 익어가는 아이들//눈을 감았다 떠도 아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심지도 않은 나무가 자랐어/생생하게 살아 있는 죽음들을/더는 넣어둘 다락이 없어/벽을 뚫고 자라나는 나무들을//여섯번째 아이가 떨어지면서/어깨 위에 잠시 앉아 있겠다고 한다//참/다정한/무게//책을 열지 않아도 죽음은 기묘하게 쏟아지고//나는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모른다(「월요일에 죽은 아이들」 부분)

고통뿐인 삶을 바라보는 눈빛은 처연하기 이를 데 없으나 시인은 “모든 악몽 위에 세워진/고요의 땅”(「선고」)에서 “돌을 나르는 것 외엔/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평생”의 허망함에 젖어들면서도 “나는 이 영원을 기록하기 위해/세상 모든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당분간 영원」)임을 자각하고 삶의 부조리 속에서도 참답게 살아가고자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하며 노래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제 시인은 “오래된 실패”(「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를 되새기면서 첫 시집의 마지막을 맺는다. 그리고 이쯤에서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해설 끝에서 은근히 우리에게 권한다. “한편 한편 도끼로 나무를 내려찍는 심정”(시인의 말)으로 써내려간 이 시집을 당신 ‘옆’에 두는 것은 어떤가라고.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플라스틱 병정들처럼/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다//우리는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풀리지 않는 숙제/아무도 내일을 믿지 않는다//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먼 훗날 염색공은/우리를 떠올릴 것이다/우연히 그의 머릿속 전구가 켜지는 순간//그는 휴지통을 뒤적여 오래된 실패를 꺼낼 것이다/스스로 번져가던 무늬들/빛을 머금은 노래를(「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부분)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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