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머리, 행정가의 눈, 시민의 가슴으로
북한을 바라본 평생의 기록
“대북 전문가는 많지만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라는 평을 들으며 지난 40여년간 남북관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온 정세현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태어나 해방 후 풍찬노숙하며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와 반항기 넘치는 청소년기를 거쳐 촉망받는 국제정치학도로 자라난 이야기부터, 연구자와 공무원 사이에서 갈등하던 청년기에 특별한 계기와 분투를 통해 남북문제의 한복판에서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는 협상가로 자리매김하는 과정까지가 여러 굵직한 에피소드 속에서 소개된다. 특히 1990년대 북핵 위기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거쳐 2000년대 6자 회담 당시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당대 한반도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헤쳐온 여정은 이 책의 백미다. 여전히 현역으로 남북 문제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분단체제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지침을 제시한다. ‘회고록’이라 하여 흘러간 이야기를 되짚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과거의 경험으로 얻은 지혜를 통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로 보며 앞으로를 생각하게 하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야 할 이때에, 평생 북한을 마주한 ‘현인’의 지혜가 우리에게 더욱 무겁고도 값지게 다가온다.
한 시골 청년이 깨우친 비주류로서의 삶
: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어느 마이너리티 리포트
정세현은 8·15 해방을 불과 두달 앞둔 1945년 6월, 당시 생계유지를 위해 북만주에 이주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가족을 따라 고향 전북 장수로 돌아왔고, 어린 시절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덕분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의 삶은 묘하게 ‘비주류’로 흘러왔는데, 중학교 시절엔 산골 오지 출신이라고, 고등학교 때엔 ‘경기중’ 출신이 아니어서 또래집단에서 배제되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신정권하에서 당시 학교장이 비상식적인 과정을 거쳐 발령받자 그는 반대 시위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내부 밀고로 발각되어 무기정학에 처해진다. 이 사건은 정세현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저는 동급생들이지만 머리 좋다고 하는 사람들,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회주의적인 태도에 굉장히 실망했어요. 그때 받았던 충격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 반대편에 서는 것이 정의다’라는 생각을 계속 품고 살았어요.”(44면)
재수 시절에는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드냐’라는 플래카드로 회자되는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했고, 사수 끝에 입학한 대학에서는 신입생 사전교육 때 어느 교수의 말을 듣고 자신의 미래를 어렴풋이 정하게 된다. “여기는 외교관시험 공부를 시켜주는 곳이 아니다. (…) 분단국에서 국제정치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이유는 하나다. 통일 문제 때문이다. (…)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며 항상 통일 문제와 연계하여 생각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65~66면)
국제정치학으로 진로를 확정한 뒤 그는 은사들의 대외활동을 통해 남북문제를 현장감 있게 접하게 된다. 일례로, 당시 서울대 외교학과 박준규 교수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적십자회담(1971년)에 남측 인사로 참석했고 그로부터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석사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이용희 교수가 통일원 장관으로서 부임하면서 정세현 또한 1977년 통일원 보좌관으로 공직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가 애초부터 공무원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본래 대학 교수가 되고자 했던 정세현은 당시 공산권 연구자 양성기관 격으로 세워진 자유아카데미에서 논문 1위의 성적을 내며 전임강사로 선발되는 등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낮에는 통일원, 밤에는 대학원’의 주경야독 생활에 돌입한 정세현은 결국 1982년 중국 공산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중국 연구자로 단연 주목받게 된다.
1980년대 들어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가 커지고 남한이 전 분야에 걸쳐 확실한 우위에 서면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한다. 정세현은 1980년 북한이 공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응할 남한 최초의 통일방안인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작성하면서 정책관료로서 탁월한 역량을 선보이며 두각을 드러낸다.
갈등이 있는 곳에 협상이 있다
: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협상가로서의 삶
정세현이 통일정책 관료로 일하던 1980년대 초반은 남북 간 체제경쟁이 시시각각 사건사고를 만들어내던 때였다. 1983년 9월 미국발 대한항공 007편 격추,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라는 비극적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이같은 상황에서 정세현은 1984년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체육회담을 총괄하여 준비하게 된다. 대화와 교류를 위해 추진되었던 단일팀은 남북 간의 냉랭한 분위기에서 무산되는데,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활극이 흥미진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1984년 8월, 남한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한강 일대의 도심이 모두 물에 잠기는 대형 재난이 일어났다. 당시 정세현은 북측의 이례적인 구호물자 전달 의사를 거절했던 청와대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전격적인 수용 덕택에 당시 북한의 수해물자 전달은 후대에도 길이 남는 큰 사건이 되었고, 바로 다음 해에 남북이 이산가족 고향 방문, 예술단 교환 방문 프로그램을 치르는 성과로도 이어진다. 협상가로서 정세현의 자질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1986년 그는 통일원을 떠나 일해연구소(현 세종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시기에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통일운동이 무척 활발해졌다. 정세현이 증언하는 당시의 후일담은 통일에 대한 관점이 남과 북 사이에서뿐 아니라 정부와 민간 사이에서도, 또한 민간의 여러 시민운동 세력 내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당시 한반도를 뒤흔든 통일운동에 대해 정부 실무자로서 시민사회가 좀더 넓은 시야를 갖길 바란 대목은 경청할 만하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자체가 북한과 공존하려는 쪽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 북미/북일 수교는 안 됐지만 한중 수교부터 끌어내고 남북 교류협력 정도를 활성화해야겠다고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 민간이 성급하게 대북 접촉에 나섰으니 정부가 오히려 부담을 가졌을 거예요.”(202면)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세현은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일하게 된다. 같은 해 북한이 NPT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제1차 북핵 위기가 발발하기도 했다. 이에 당시 미국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섰고 이를 1994년 제네바 합의로 마무리짓는다. 정세현은 이와 같은 상황을 마주하면서, 대통령 한 사람의 대북관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절감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본인의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라고 호언했지만, 실제로는 북한의 붕괴를 확신하며 임기 내내 북한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다. 정세현은 이때 대통령 자신이 취임사에서 밝힌 대로 남북 간의 공조를 우선시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을 토로한다. 1994년 김일성 조문 파동, 1995년 대북 쌀 지원 ‘퍼주기’ 논란, 1997년 황장엽 노동당 국제비서 탈북 등 문민정부 내내 대통령의 대북관이 낳은 안타까운 외교실패 사례가 반복되었다.
북에 대한 지원은 퍼주기가 아니라 ‘도리’ 아닌가
: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1990년대 말은 북한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붕괴론이 하나의 정설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전 세계적으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늘어나면서 남한 또한 식량 등의 지원에 나선다. 다만 분단체제 아래에서 70여년간 적대해온 터라 남한 내부의 반대 의견이 만만찮았다. 이에 대해 정세현은 통일정책이 갖는 현실적인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대북정책이 국민들 90퍼센트, 100퍼센트 동의를 구하기는 어려워요. 51 대 49만 되어도 대북정책에서 추진력이 생길 수 있어요. (…) 남북문제에 관한 한 100퍼센트 초당적 협력은 기대할 수 없고, 다만 햇볕정책이나 남북 화해협력 정책으로 성과를 냄으로써 평화가 피부에 와닿게 인식시켜주면서, 이게 나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을 늘리는 수밖에 없어요.”(547~48면)
정세현의 이같은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는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차관으로 발탁되면서 빛을 발한다. 전임 정부의 통일부 차관이었던 정세현을 그대로 차기 정부의 동일 직책으로 발령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전례 없는 인사 조치는 김대중 사후 공개된 메모를 통해 이해된다. “대북 전문가는 많지만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313면)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취임 직후 터진 금창리 지하동굴(핵실험) 사건으로 일촉즉발의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정세현은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을 주도하며 민간인들의 북한 방문 조건을 대폭 완화하고 민간 기업의 대북 투자 상한선을 철폐하는 등 적극적으로 선민후관(先民後官) 정책을 펼친다.
2002년 1월 29일은 정세현이 김대중 정부의 통일부 장관으로 취임한 날이자 부시 미 대통령이 의회 연설을 통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날이기도 하다. 북한 또한 연이어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강행하는 등 대외적으로 악조건만 형성되는 때였다. 이러한 척박한 상황에서 정세현은 금강산 관광사업, 개성공단 유치 등에 매진한다. 대다수의 여론이 남과 북이 독자적으로 경제협력을 이뤄가기보다는 국제 자본, 즉 미국과 일본이 먼저 들어간 뒤에 남한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때에 정세현은 당시 남과 북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를 해결해낸다. 정세현의 일관된 입장은 북한 당국자들까지도 움직여, 결국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공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통일의 미로’에 서서
창비가 정세현의 회고록을 처음 기획한 것은 2018년 가을 무렵이었다. 당시는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9·19 평양 남북 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의 평화가 금방이라도 도래할 것 같던 때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기대와 희망을 반영하여 이 책을 2020년 6월, 즉 한국전쟁 발발 70년이자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20주년에 맞춰 출간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안타깝게도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어떤 성과도 없이 결렬되면서, 또한 이어진 10월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이 아무런 합의도 도출해내지 못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급격히 냉랭해졌다. 이에 2020년 초 북한은 자력갱생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언했고 북미 간의 교착과 대치는 1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대담자 박인규의 말처럼 “미국 대선이 있는 2020년 안에 북미 협상의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651면) 할 것이다.
이같은 암중모색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판문점의 협상가』가 담아낸 정세현의 삶에서 우리는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북미관계가 교착되었다면 남북관계에서 그 돌파구를 찾아야 하며, 특히 남북이 무람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직접 그 방향키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촉구한다. 이 책은 한 사람의 회고록을 넘어 대북관계사의 한 시대를 오롯이 증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난맥상의 통일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뚜렷한 관점과 함께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Changbi Publis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