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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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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연구의 선구자가 신경과학으로 살펴본 망각의 모든 것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짐 캐리)은 한때 사랑했으나 이제는 지긋지긋해진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과 헤어지기에 앞서 그녀와의 모든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기억 삭제 시술을 받던 중 의식 일부가 깨어나 자신의 ‘아픈’ 기억뿐 아니라 ‘행복한’ 기억, 남기고 싶은 ‘추억’마저 모두 지워버리는 것을 목격한 그는 결국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 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어떤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육체적 고통까지 느껴본 사람은 한번쯤 꿈꿨을 것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는’ 일을.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기계를 이용하거나 알약을 하나 삼키면, 나쁜 기억이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리는 일을.

또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이런 욕망도 있다. ‘중요한 사건, 아름다웠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 열쇠 둔 곳을 잊거나, 핸드폰을 냉장고 속에서 발견하면서 ‘부디, 더 이상 기억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유지되었으면’ 하고 절실히 바란다.

문학 작품은 ‘완벽한 기억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소재로 삼곤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쓴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말에서 떨어진 뒤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기억력을 얻어 특정한 날, 하늘에 뜬 구름 모양 같은 자질구레하고 세세한 사항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는 농부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머릿속에 빼곡하게 쌓이는 정보가 괴롭다.

인간에게 기억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망각도 살아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억과 망각,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요소가 실제 인간의 뇌에서 어떻게 투쟁하는지, 우리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특정 사건을 기억하고, 또 잊는 것인지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살펴본 책 《망각의 기술(원제: The Art of Forgetting, 심심 刊)》이 출간되었다.

책을 쓴 이반 안토니오 이스쿠이에르두(Ivan Antonio Izquierdo)는 기억을 저장하고 인출하는 뇌의 활동과 과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기억 연구의 세계적 대가이자 신경생물학 분야 선구자다. 이스쿠이에르두는 주로 생물학적 기제에서 기억 과정을 설명하는 일에 초점을 뒀는데, 이를 위해 정신생물학부터 신경화학, 약리학, 신경생리학, 실험신경학에 이르는 여러 학문을 가리지 않고 복합적으로 활용해왔다. 그는 기억 응고화(뇌에서 어떤 정보가 기억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이르는 말)와 상태 의존 기억(특정 상태일 때만 인출되는 기억으로 갈증, 공포, 스트레스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부분 공포를 느끼지 않는 한 공포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의 인출 조절에 에피네프린, 도파민, 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티드, 그리고 아세틸콜린 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최초로 밝혀냈다. 이스쿠이에르두 덕에 우리는 포유류의 뇌가 기억을 어떻게 형성하고 인출하는지, 혹은 유지하거나 소거하는지 그 분자적 기반을 알게 되었다. 또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의 기능을 최초로 구별한 인물이 그다.


이스쿠이에르두의 실험실에서 진행한 연구를 포함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최신 연구는 뉴런과 뇌 체계의 활성화가 어떻게 인간의 학습과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왔다. - 10쪽, 추천의 말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듯,

우리가 망각하는 것 또한 우리 자신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스쿠이에르두는 ‘우리가 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보여주고자 이 책 《망각의 기술》을 썼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디에서 일하는지, 가족이 누구인지 같은 정말 중요한 정보는 잊지 않는다. 이런 기억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정보를 우리는 잊는다. 매일, 시시각각 우리 기억의 많은 부분이 영원히 사라지지만, 우리 대부분은 무리 없이 활동하고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하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처럼 망각은 필요한 정보는 남기고, 그 외의 것은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한쪽으로 치워두면서 뇌가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다. 무엇을 잊느냐 또한 무엇을 기억하느냐 만큼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 짧은 책에서 우리가 망각하도록 학습하거나 선택하는 것이 또한 바로 우리 자신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잊어버린 것은 마치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낯설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뇌에 없고, 따라서 우리 것이 아니다. - 29쪽


기억과 망각은 영화나 문학 작품 속 소재로 자주 등장할 만큼 인류 보편의 관심사이나, 대개 ‘과학’과는 거리가 먼 주제라고 여겨져 왔다. 특히 과거에는 기억을 무언가 ‘신비로운’ 과정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생물학적으로 연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캘리포니아대학교 제임스 맥고 신경생물학 교수를 비롯한 선구적 학자들의 노력으로 기억이 비로소 과학의 품에서 연구되기 시작했다.(36쪽-38쪽)

물론 19세기 후반 진정한 선구자들, 즉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헤르만 에빙하우스 등의 연구가 기억과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조건’을 밝혀내 훗날 진행한 기억 연구의 포석 역할을 하기는 했다.

이 책은 그동안 ‘기억’과 ‘망각’에 대해 막연히 궁금해 하던 질문, 이를테면 ‘우리는 왜 잊을까?(47쪽),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잊을까?(50쪽)’ 등에 과학적 해답을 준다. 앞서 살펴본 선구자들의 연구를 비롯해 저자 자신이 직접 참여한 신경생물학 연구 성과와 다른 동료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엮어 뇌에서 벌어지는 기억과 망각의 원리를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 연구에 헌신한 노(老)학자의 경험과 생각, 역사적 개념, 문학적 은유 등이 어우러지며 흥미진진하면서도 유용한 통찰을 페이지마다 펼쳐낸다. 앞서 기억 연구의 선구자로 지목한 제임스 맥고는 추천의 말에서 이 책을 “대단히 매력적이면서 신중하고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라고 추켜세우며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잊지 못할 성 싶다”고 말했다.


뇌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생존을 위해 망각한다

인간의 뇌는 일종의 ‘기술’을 써서 어떤 기억을 망각하게 하거나, 망각하도록 촉진한다. 이스쿠이에르두는 뇌가 우리 의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이 기술을 행한다고 말한다. 뇌는 왜 자발적으로 망각할까? 가장 큰 이유이자,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서다. 우리 뇌는 기억을 형성하고 인출하는 기제가 포화하지 않도록 쓰지 않는 기억을 정리해 새로운 기억에 자리를 물려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망각의 기술’은 모두 4가지로 습관화, 소거, 차별화, 억압이 그것이다. 이 4가지 방식은 모두 기억을 지우는 대신 기억으로의 접근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사실상 이 4가지가 대부분의 사람이 망각이라고 하는 것(기억을 불러낼 때 그야말로 그 기억이 없는 것)을 이룬다. ‘망각의 기술’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게 하는 이들 4가지 방식을 이용하고, 또 기억을 변조하는 데 집중된다. 따라서 그것은 진짜로 망각을 하는 즉, 기억을 삭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뇌가 기억을 억제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기술이다.


망각의 기술은 애석하게도 다른 어떤 기술만큼이나 불완전해서 기억의 삭제를 촉진하거나 방지하는 기술이 아니다. 뇌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우리 의지의 어떤 관여도 없이 단독으로 이 기술을 행한다. - 55쪽


이 책에 등장하는 망각의 4가지 기술

1. 습관화. 습관화는 20세기 초 러시아 생리학자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가 이야기한 개념이다. 처음 방에 들어가서 좀 더 익숙해질 때까지 우리는 대개 방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어떤 소리를 듣거나 섬광에 노출되거나 누군가 방에 들어오면 자극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런 자연스런 반응은 파블로프가 ‘뭐지? 반사’라 이름 붙이고 대부분 과학자는 ‘지향 반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는 동물은 모두 지향 반응을 보인다. 인간보다 후각이나 청각이 더 예민한 개, 고양이, 또는 다른 동물은 귀와 코에 자극이 오는 방향으로 향한다. 지향 반응은 자극이 반복될수록 강도가 줄어들고 마침내 사라진다. 예를 들어 경적소리를 처음 들으면 놀라서 그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열아홉 번째로 경적소리를 들으면 그냥 무시해버린다. 이런 점진적인 반응의 억제를 바로 ‘습관화’라 한다.(55-56쪽) 습관화는 우리가 세상을 좀 더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도록 도와준다. 공항 같은 시끄러운 장소 또는 극장처럼 빛이 많거나 공공시장처럼 여러 목소리가 뒤섞이는 곳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57쪽)


2. 소거. 망각의 기술 중 ‘소거’ 원리를 알아보려면 다시 파블로프의 실험실로 돌아가야 한다. 소거는 우리에게 친숙한 ‘조건 반사 실험’으로 설명된다. 어떤 상황, 소리, 빛, 냄새 같은 중립적인 자극이 파블로프가 “생물학적으로 의미 있는”(항상 먹이, 물, 고통, 아픈 느낌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자극이라고 말한 것과 반복적으로 병행되면 전자(중립적인 자극)에 대한 반응은 후자(생물학적으로 의미 있는 자극)와의 연관성에 의해 조건화되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신호음을 내는 일과 먹이를 주는 일이 병행되면 개는 그 신호음에 타액을 분비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때 신호음은 조건 자극, 먹이는 무조건 자극, (개가 습득한) 신호음에 타액을 분비하는 반응은 조건 반사다.(58쪽) 무조건 자극은 조건 행동을 강화하기 때문에 ‘강화물’이라고 부른다. 일단 조건화를 확립한 뒤 강화물을 생략하면 동물은 조건 반응을 억제한다. 이것이 바로 ‘소거’다.(59-60쪽) 즉 신호음에 먹이를 줌으로써, 먹이가 없어도 신호음에 타액을 분비하던 개에게 신호음만 들려주고 먹이를 주지 않도록 학습하면 타액 분비가 멈춘다.


3. 차별화. 생물학적으로 의미 있는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과 ‘질적으로 비슷한’ 자극에 대한 반응을 억제하는 것이 바로 ‘차별화’다. 이 역시 예를 통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킬로헤르츠의 신호음에 뒤이어 고기가 나오는 조건화 과정에 따라 훈련된 동물은, 고기를 예상하고 신호음에 침을 흘리도록 학습할 수 있다. 다른 신호음, 말하자면 10킬로헤르츠의 신호음과 ‘질적으로 비슷한’ 11 또는 15킬로헤르츠의 신호음을 들어도 처음 몇 번은 역시 침을 흘린다. 이것을 ‘일반화’라고 한다. 하지만 10킬로헤르츠 외의 다른 신호음에 고기가 뒤따라오지 않으면 동물은 곧 침 흘리기를 중단하고 고기가 뒤따라오는 10킬로헤르츠의 신호음에만 반응해 침을 흘릴 것이다. 일반화는 아주 흔한 현상이고 어린 아기가 주변 모든 남성을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도 똑같이 일어난다. 곧 아기는 진짜 아버지를 가리키는 데만 한정해서 이 말을 쓰도록 스스로 학습한다. 이처럼 부적절한 자극에 반응하는 일(다른 신호음에 타액을 분비하는 일 또는 아무 남성을 보고 아빠라고 부르는 일)을 억제하는 걸 ‘차별화’(또는 변별)이라고 한다.(60-61쪽)


4. 억압. 앞서 설명한 망각의 세 가지 기술(습관화, 소거, 차별화)은 학습 형태다. 마지막으로 제시할 망각의 기술인 ‘억압’은 학습 형태는 아니다. 억압은 의식 안으로 어떤 기억을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 그 표출을 억제하는 기제를 설명하려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만든 말이다. 

뇌는 보통 정상적인 삶을 위해 고통스럽거나 무시무시하거나 아니면 유쾌하지 못하거나 원치 않는 기억을 말소한다. 여성이 출산하며 겪은 고통스런 기억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둘째아이를 갖는 여성의 수는 아주 적을 것이다. 치과에서 경험한 고통과 불편한 기억을 억압하지 않으면 치아 질환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늘 것이다. 오랫동안 억압은 정신분석학의 ‘가설’로만 ‘설명’되어왔다. 그런데 신경생리학 위주의 최근 연구가 ‘자발적 억압’이 뇌 체계 작동 결과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았다.(209쪽) fMRI를 이용한 세 건의 관찰이 기억의 자발적 억압에 ‘뉴런’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210-211쪽)


기억과 감정의 관계부터 가장 훌륭한 기억 훈련법, 알츠하이머병을 위한 변명까지

기억과 망각 이슈를 종횡무진 누비는 기억 교양서

이스쿠이에르두는 책에서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 원격 기억, 작업 기억 등 각종 기억의 종류뿐 아니라 이 기억들이 실제 뇌 안에서 어떤 기제로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를 들려준다. 신경과학 분야 최고 전문가가 풀어놓는 친절한 설명을 듣는 일은 우리의 기억 수준뿐 아니라 지적 만족도를 한껏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3장)

인간을 비롯한 모든 포유류가 항상,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정한 감정 상태에 있으며, 기억이 응고화할 때 즉 기억이 만들어질 때 감정적으로 가장 강렬한 기억이 더 잘 기억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왜 그런 것일까? 이스쿠이에르두는 기억과 감정의 관계를 생물학의 관점에서 자세히 다룬다.(4장)

망각은 기억과 쌍둥이다. 따라서 기억 이야기가 곧 망각 이야기다. 기억을 유지하는 데 정기적인 훈련이 필요한데, 이스쿠이에르두가 추천하는 가장 좋은 기억 훈련법은 바로 ‘읽기’다. 그러면서 그는 ‘읽기’가 왜 기억 훈련의 가장 좋은 방법인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설명과 증거를 내놓는다.(5장) 각 기억을 형성하는 데 사용하는 시냅스, 즉 해마와 기저외측 편도체, 내후각피질, 전전두엽피질과 소뇌, 기저핵에 있는 그 방대한 양의 시냅스를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하는 거의 유일한 활동이 바로 ‘읽기’라는 것이다.(134쪽) 읽기는 모든 뇌 영역과 기억 형태를 사용하고 실행하는 유일한 활동이다. 읽을 때 우리는 흔히 다른 감각 기억과 더불어 작업 기억, 언어 기억, 시각 기억, 영상 기억, 의미 기억을 실행하고 또 많은 경우 운동 기억도 실행한다. 이스쿠이에르두는 따라서 기억을 훈련해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읽고, 읽고, 또 읽는 것이라고 단언한다.(138쪽)

우리는 망각을 좋지 않은 것, 고쳐야 할 습관, 심지어 질병으로 여긴다. 자동차 열쇠를 어디다 두었는지 잊어버리는 가벼운 건망증부터 경도인지장애, 그리고 심하게는 치매까지 망각은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알츠하이머병은 정말로 그토록 무서운 병일까?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더 이상의 삶은 무의미하고, 인생도 끝난 것일까? 이스쿠이에르두는 초기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는 ‘좋은 기억력의 섬’이 있다고 말한다. 섬은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내후각피질이나 두정엽피질의 비교적 손상이 덜한 실제 조직을 일컫는다.(187쪽) 망각의 홍수 속에 잘 보존된 기억의 섬 덕에 알츠하이머병 환자라도 옛 제자와 자기 전공분야 논문 얘기를 하며 토론할 수 있고, 학술대회에서 간단한 발표도 할 수 있다. 이스쿠이에르두는 따라서,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이미 인생이 끝난 사람으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는다.(6장)


일부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정신의 파편이 끝까지 아주 잘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목숨을 건 투쟁에서 퇴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189쪽 


민주주의는 더 나은 기억력을 요구한다

브라질인이나 영국인이 지난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까맣게 잊은 일, 미국인이 한때 이웃의 아들이 파병되었던 아프가니스탄 또는 이라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스쿠이에르두는 민주 정부 아래서 이루어진 이런 종류의 망각은 독재 정부의 끈질긴 선전이나 기억 조작 때문이라기보다는 ‘주의력’이나 ‘관심’이 부족한 결과 기억이 소실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며,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천은 분명 이보다 훨씬 더 나은 기억력을 요구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한다.(170쪽)


무지에서든, 주입된 허위 정보에서든, 또는 둘 다에서든, 주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망각은 자유로운 개인인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길한 미래의 징조다. 이를 해소하는 기술은 민주주의 사회가 이미 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 173쪽


앞서 이야기했듯, 책을 쓴 이스쿠이에르두는 기억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이 작고 짧은 책을 여러 번 읽고 음미하면 할수록 내공을 실감하며, ‘기억과 망각의 엣센스’만을 길어 올렸다는 생각에 무릎을 치게 되는데, 이는 이 책이 저자의 오랜 땀과 헌신으로 맺은 귀중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을 기반으로 뇌의 기제를 설명하는 등, 다소 전문적인 주제를 포함한 책인 만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지내며 시립 보라매병원에서 치매 치료 전문의로 활동하는 이준영 교수가 전문 용어를 감수했다. 

이 교수는 감수의 말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거나, 잊고 싶은 기억을 잊게 되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친다면 실망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신 이 책의 미덕을 “인간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 중 하나인 기억과 망각이 사실은 뇌의 생화학적 과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생화학적 기제가 존재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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