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신화로 기억되는 ‘새마을’
냉전과 분단의 층위에서 그 역사적 진실을 밝히다
새마을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농촌사회 곳곳에 울려 퍼지는 ‘잘살아보세’라는 노랫소리와 함께 마을길이 넓혀지고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나 기와지붕으로 개량되던 ‘새마을운동’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박정희 정부가 건설하려고 했던 새마을의 한 단면일 뿐이다. 허은 교수의 신간 『냉전과 새마을: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와 분단국가체제』는 새마을의 전모를 동아시아 냉전의 맥락에서 거시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새마을에 기반한 ‘1972년 분단국가체제’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한 역저이다. 박정희 정부가 수립한 분단국가체제는 ‘냉전의 새마을’을 토대로 삼은 체제이자, 동아시아 냉전의 근대화 원리를 공유하고 관철한 체제였음을 밝혀낸다. 특히 새마을에 관한 기존의 연구가 안보영역을 도외시한 채 개발영역에 국한되어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공백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동아시아-한반도-한국사회’라는 중층적인 공간을 관통함과 동시에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시간대를 아우르는 치밀한 연구를 통해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한 새마을 건설을 동아시아 냉전의 맥락에서 새롭고 넓은 시야로 재조명한다. 만주국의 집단부락에서 말라야의 신촌, 남베트남의 신생활촌, 한국의 대공(對共)새마을까지 이어지고 겹쳐지는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새마을은 동아시아 냉전의 산물이었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냉전의 새마을’의 원형을 이루는 1930년대 만주국 농촌사회를 고찰한다. 만주국은 일본 제국의 대륙팽창 최전선이자 소련을 봉쇄하는 반소‧방공의 최전선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만주국에서 일제가 벌인 지역사회 지배정책을 고찰하여 ‘냉전의 새마을’의 원형을 이루는 공간과 제도의 등장을 살펴보고, 만주국의 조선인 ‘방공전사’들이 한반도 분단 과정에서 ‘냉전전사’로 거듭나며 자신의 경험을 전파하는 과정을 살핀다. 2부는 시공간을 달리한 역사적 경험이 동아시아 냉전의 전개 속에서 교류되는 과정을 다룬다. 한국군이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와 환류에 능동적인 주체로 참여할 수 있었던 계기로 5·16군사쿠데타와 베트남전 참전을 주목한다.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주도하에 민주적 민군관계를 배제하고 베트남전 참전의 길을 걸은 한국군은 자신의 역사적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 ‘냉전의 새마을’ 건설 경험의 교류와 확산에 일익을 맡았다. 3부는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역사적 전환기’로 불렸던 시기를 조명한다. 1968년 1·21사태 전후 북한의 대남 무장침투가 급증하고 동아시아 냉전 구조가 유동하면서 한반도 안보의 불확실성과 평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제공했다. 이 격변의 시기에 관한 고찰을 통해 저자는 다른 선택지들이 차단되고 냉전의 새마을에 기반을 둔 분단국가체제가 수립(1972년)된 계기와 과정을 보여준다. 4부는 안보에 초점을 둔 ‘지역방위체제’ 구축을 통한 농촌사회의 재편을 살펴본다. 특히 냉전의 새마을 건설과 작동 기제를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을 중심으로 마을 차원에서 미시적으로 고찰하여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으로 건설해간 냉전의 새마을이 보인 특성을 규명하고, 분단국가체제가 밑으로부터 균열, 해체되어갔음을 살펴본다. 종장에서는 냉전의 새마을에 기반을 둔 1972년 분단국가체제의 역사적 성격을 정리하고, 냉전을 위한 공동체가 아닌 인간을 위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전환을 살핀다.
적대와 불신의 공간 ‘냉전의 새마을’
1972년 분단국가체제의 역사적 성격
박정희 정부는 ‘냉전의 새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이른바 ‘대공(對共)새마을’이라는 지배체제를 수립했고, ‘대공요원—대공조장—대공조원’을 주축으로 하는 감시체제에 이장, 새마을지도자 등을 배치했으며, 이장과 반장에게는 민방위책임을 맡겨 안보와 개발의 책임자를 통합시켰다. 대공새마을 지배체제는 공동체 구성원 전부를 감시자이자 피감시자로 만들고, 경찰이 다수의 망원을 배치하여 이를 감시하는 중층적인 감시체제를 작동시켰다. 공동체 안에서 ‘내부 적’으로 분류된 이들은 감시체제를 벗어날 수 없었고, 정신질환으로 분단국가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이들도 잠재적인 내부의 적으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았다. 즉 ‘냉전의 새마을’은 감시와 통제, 정신개조와 사회순화를 지배체제의 수단으로 삼은 박정희와 친위세력이 추구한 이상향의 현실태였다. 박정희 정권은 분단국가 지배체제의 안정을 흔들 소지가 있는 요인들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마을 단위까지 동원과 통제를 위한 체제를 확립하려 했고, 다시 말해 불신에 찬 공간이자 의사적(疑似的)인 자치를 허용한 ‘냉전의 새마을’을 건설한 것이다.
‘냉전의 새마을’에 의거한 지배체제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공동체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권리가 공동체 구성원에게서 박탈되었다는 점이다. 공동체에 적대와 불신을 내장시켜 지배와 동원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분단국가체제에서 민중은 동아시아 열강의 이해 추구와 집권자의 권력 유지의 도구로 전락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기제를 가질 수 없었다. 국가안보제일주의와 경제성장제일주의를 천명하며 수립된 체제는 역설적으로 국민을 안보와 개발의 주체가 아닌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체제이자, 나아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의 인권과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는 체제였다.
‘1972년 분단국가체제’의 등장은 일제의 방공전사에서 전후 냉전전사로 거듭난 이들이 반만항일(反灣抗日)운동 및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을 진압하고, 베트남전쟁 평정에 참여하여 체득한 원리를 이식하고 원용한 결과물임과 동시에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와 환류가 낳은 결과물이다. 또한 박정희와 친위세력이 1960년대 후반 이래 1970년대 초반까지 역동적으로 전개된 국내외의 변화를 인민전쟁 위협론이라는 관점에서 재단하며 절대권력과 영구집권을 추구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는 집권세력 스스로가 외적으로는 동맹을, 내적으로는 민초를 불신의 대상으로 삼고 이러한 불신이 위기의식을 다시 심화하는 악순환의 구도에 빠져드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1972년 분단국가체제’는 비인간화를 악화, 지속하는 체제이자, 전근대적 지배원리를 변용한 지배체제였다. 분단국가체제는 결국 6월항쟁과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와해되어갔다.
왜 지금 ‘새마을’인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위하여
저자는 지금 이 시점에 새마을과 분단국가체제를 고찰해야 하는 이유로 두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학문적인 이유이다. 지금까지 새마을의 이미지는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근대화의 열망, 농촌개발의 신화로 고착화되어왔다. 이러한 역사상은 동족상잔이자 세계대전인 전쟁을 3년간 치른 뒤 분단선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실제 한반도 역사와 거리가 멀다. 또한 이는 동아시아 냉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전개된 한국현대사를 휴전선 이남에 국한되어 바라보게 만들고, 식민지배와 분단의 대립을 거치며 전개된 근대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제약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냉전의 결과물로서 새마을을 재고찰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적인 이유이다. 6월항쟁 이래 30년이라는 탈냉전기를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에서는 각종 사회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여기에 더해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된 채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완충지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사회가 추구하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구현한 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인지 떠올리기 어렵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그러므로 냉전‧분단시대 체제경쟁의 승리를 위해 비인간화를 강요한 공동체, ‘냉전의 새마을’의 역사적 경험을 숙고해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변화를 만들어왔던 민초의 여러 실천을 읽어내며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찾는 노력이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민중이 극복해온 역사적 장애물을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고투해온 우리의 역사를 깊게 이해하고, 나아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저자의 학문적 열정과 소망을 담은 이 책은 분단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한국 독자들에게 큰 울림이자 계기로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