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포로가 되어 제국으로 끌려오게 된 루엘은 악명 높은 데이몬드 공작 성의 하인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수수께끼의 소녀와 만나 호감을 키워 가던 것도 잠시, 그가 공작 성의 주인 카이르 데이몬드임을 알게 되고 원치도 않은 공작의 정부 자리에 앉혀지게 되는데……
***
“보내…… 주세요.”
루엘의 대답에 카이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루엘은 무섭지가 않았다. 그라면, 왠지 부탁을 하면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무슨 의도로 절 정부의 자리에 앉힌 건지는 모르지만…… 전 싫어요. 전, 제가 하던 일도 재미있고…… 제 자리가 좋아요.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니에요.”
루엘의 말이 끝나도 카이르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조용해 루엘이 더듬더듬 그를 부를 때, 카이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독한 두려움이 신경을 타고 쭈뼛 올라갔다.
루엘은 단 한 번도 카이르가 자신에게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네, 네?”
목소리가 절로 덜덜 떨렸다. 몰랐는데 이제 보니 온몸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겁에 질린 짐승마냥 덜덜 떠는 루엘을 보는 카이르의 눈빛이 더욱 어둡게 빛났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듯.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서며 물러섰다. 그 과정에서 의자가 뒤로 넘어져 시끄러운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밖에 아랫사람들이 대기 중일 텐데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조차 않았다.
“사, 살려 주, 흡!”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카이르의 손바닥이 루엘의 입을 가렸다.
“말했잖아. 착각하지 말라고. 네 뜻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곳에선 오로지 내 의지만이…….”
카이르가 루엘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속삭였다. 아주 나긋나긋하게.
“중요하지. 넌 그저 다리를 벌리라고 하면 벌리면 돼. 나의 귀여운……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