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한라산의 시인 이산하, 희망 없는 세상에서
절망하지 않되 응시하고 저항하는 시 정신의 향연
*본 보도자료에는 시인과의 서면 인터뷰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제주 4·3항쟁의 진실을 폭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으로 옥고를 치르고 긴 시간 절필 끝에 두 번째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1999)를 발표했던 이산하 시인이 그러고도 다시 22년이 흘러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을 출간했다. ‘적’의 정체가 분명했던 시절에 격렬히 저항했고 그로 인해 안팎으로 상처를 입으며 벼렸던 시인의 날 선 시선과 감성은 겉으로는 안온한 일상으로 포장된 오늘날의 ‘적’을 만나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켜 어떻게 다시 빛을 발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편들로 빼곡한 시집이다. 자신을 찍을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겠다는 ‘나무’의 자세로 시를 쓴 시인 이산하,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이번 시집은 아직도 열렬하게 살아 있는, 저항하는 시 정신의 향연이다.
역사와 인간 앞에서 겸허해지며
일상에 숨어든 악을 정면 응시하는 시 정신
이십대의 문학청년이 목격한 ‘제주 4·3항쟁’의 진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시를 쓰고 발표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던 엄혹한 시절을 통과하며 시인은 이제 노년을 맞이했다. 자신이 맞닥뜨렸던 불의와 불합리와 부정의 세상은 이제 한결 보드랍고 온화하고 민주적인 표피를 보이지만 양상과 방식을 달리해 여전한 불의와 불합리와 부정 투성이다. 광주항쟁의 피해자를 비아냥하고, 세월호사건 피해 학생을 조롱하는 듯한 SNS의 글에 환호하는 이들이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임을 알기에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악의 평범성1」)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악’은 결코 비범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기에 어쩌면 더 악랄해지고 지독해졌으리라. 이런 ‘악’을 양산하는 사회구조는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노동을 천시하는 변질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기반으로 한다.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며 폭주하고 있다./맑스의 자본론이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엥겔스의 여우사냥」)는 시인의 통찰에 눈이 번쩍 뜨이는 이유이다.
해설을 쓴 김수이의 말대로 이산하의 이번 시집은 “최근 시단에서 찾기 힘든, 거시 역사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시집이다. 해서 김수이는 이 시집이 세 가지 유형의 바퀴를 그린다고 해석한다. 첫째,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으로서의 수레바퀴로 ‘자본론과 진화론’(「엥겔스의 여우사냥」)으로 대표되는 바퀴이다. 둘째는 역사를 피로 물들여온 악의 평범성, 즉 인간을 살상하는 끊임없는 폭력의 바퀴로 “한국전쟁 때 미군지프에 깔려 죽은/북한 인민군들 머리와 몸의 바퀴자국이 마치 지퍼무늬 같다고 해서”(「지퍼헤드2) 생긴 ‘지퍼헤드’라는 표현으로 상징된다. 셋째, 꿈과 신념이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도 인간이 두 손으로 굴리는 삶의 바퀴이다. “두 바퀴를 두 손으로 직접 굴리는 이 휠체어는/천천히 손에 힘을 주는 만큼만 바퀴자국을 남긴다”(「산수유 씨앗)에서 휠체어 바퀴자국은 앞세대와 뒷세대,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이어져야 하며, 인간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준다고 해석한다. 타인과 함께하는 발걸음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시인의 말」)는 이 시집이 그려낸 세상에서, 희망은 없을지언정 시인은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다. 또한 형형한 눈빛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와 현실을 마주하는 시인은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여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한다.
--------------------------------------------------------------------------------
이산하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질의: 편집자)
-22년 만의 신작 시집을 펴내셨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시를 안 쓰신 것은 아닐 텐데, 시집이 이렇게 늦어진 이유가 있으신지요?
시보다는 산문과 번역에 치중했던 편이다. 그동안 짧은 아포리즘 같은 산문집 생은 아물지 않는다, 산사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 피었으므로 진다, 장편성장소설 양철북, 번역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프리모 레비 지음) 체 게바라 시집(체 게바라 지음), 복원판 시집 한라산 등 7권을 내며 여러 악기들을 연주해보았다. ‘시’라는 악기도 혼자 틈틈이 튜닝하며 연주했는데 공연만 오랜만에 했을 뿐이다.
-‘한라산의 시인’이라는 표현은 훈장일 수도 있으나 족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유배지」에서도 본인이 한라산으로 인해 유배를 갔고, 이제 새로운 유배지가 어른거린다고 쓰셨습니다. 이산하 시인에게 한라산은 어떤 의미인가요?
「한라산」 서사시는 내 27살의 비명이자 통곡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평생의 짐이 될 줄은 몰랐다. 네게 너무 많은 진실을 강요했고, 너무 많은 물고문의 악몽을 상기시켰다. 나도 가끔은 진실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럴수록 더욱 강박감의 늪에 빠진다.
-이번 시집을 묶으면서 각별히 집중했던 주제나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고문당할 때 가장 힘든 것은 고문자가 웃으며 자기 자식들 자랑할 때이다. 그리고 더 힘든 것은 그들이 나와 똑같이 평범한 얼굴들이라는 점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은 인간이 얼마만큼 인간이기를 포기하는가이다. 우리는 가끔씩만 인간이 된다.
-시와 문학의 정치성과 사회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 다수 실렸다. 여전한 사회적 모순에 마음과 눈길을 보내는 시인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시는지요?
세상은 강자가 약해져야 바뀌는 게 아니라 약자가 강해져야 바뀐다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다음 시집은 언제쯤 기대해도 좋을지요?
8명의 젊은이들이 동시에 처형된 ‘인혁당 사건’ 서사시를 내년쯤 낼 예정이다.
[책 속에서]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나무」 전문
내 독방은 옛날에 한 사형수가 살았던 방이었다.
그가 무기수로 감형돼 30년을 살던 어느날
친한 교도관이 3일 뒤 특사로 나갈 거라고 귀띔했지만
특사명단은 극비라 반신반의하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그날부터 그는 사형선고 때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석방일 아침 교도관이 수번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3시간쯤 전 화장실 창살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다.
너무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두려움 탓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3시간을 더 기다릴 수 없었던 탓이었을까
―「3시간」 전문
나이에 맞게 살 수 없다거나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때마다
난 얼어붙은 겨울 폭포를 찾는다.
한때 안팎의 경계를 지웠던 이 폭포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자신의 모든 틈을 완벽하게 폐쇄시켜
폭포 바닥에 깔린 돌들의 외침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물방울들의 그림자며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저 헛것들의 슬픔까지
폭포는 물의 마디마디 꺾어가며
자신을 허공으로 던진다.
―「겨울 폭포」 부분
TV의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을 무심히 보는데
가수 이효리가 내 시를 낭송하는가 싶더니
추념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입에서 내 이름까지 나왔다.
아득히 환청처럼 들리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은 감옥 밖으로 나왔지만 ‘이산하 시인’이라는 이름은
극좌의 상징으로 3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유배된 상태였다.
4·3의 진실을 폭로하다 외면당한 금기의 이름이었다.
‘아—이제야 유배에서 풀려났구나……’
혼자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유배지가 어른거렸다
―「새로운 유배지」 부분
거듭 말하노니,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이거늘
끝까지 그대들이 그대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숨 쉴 때마다 언제나 ‘최후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디며 숨을 쉬어야 한다.
빗줄기가 바람 한 점 없이도 허공의 허리를 베어내고
오래 참고 참았던 꽃들이 마침내 피어나는 이 작두골에서
그대 산 자들에 대한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이 추도시를 쓴다.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부분
--------------------------------------------------------------------------------
[추천사]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문재 시인
-------------------------------------------------------------------------------
[시인의 말]
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여 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2021년
이산하
Changbi Publis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