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진강호의 차녀. 진교희.”
눈보라 치는 설산. 이젠 수만 대군의 무덤이 된 그곳을 뒤로하고 수도로 이송된 그녀는 황실의 살아 있는 액받이 인형, ‘액비’가 될 운명에 처하고 만다.
“진교희라는 죄인의 진명을 호명부에서 지우고.”
그때, 다짐했다. 제아무리 비범한들 홀로 살아남은 계집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저들에게.
“대신 패비敗妃라는 이름을 내린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내가, 너희의 끝을 보리라.
…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든 이용해야 한다.
설사 이 피비린내 나는 황실에서 어찌 살아남을지가 우려스러운 제 어린 지아비라 할지라도.
그녀의 지아비로 낙점된 자는 바로 가장 불행한 황족이자 가장 아름다운 황자로 불리는 삼 황자, 길리우.
“보, 보자, 마자, 부, 부인, 생각이, 나서.”
황실의 적장자임에도 불구, 말더듬이인데다가 또래에 비해 작고 유약하여 진즉 부황의 눈 밖에 난 그는.
“내, 내가… 좋아하는, 이가.”
하필이면 생의 첫정을 이 여인에게 주고 말았다.
“…그대라서, 다행이오.”
대장군이었던 아버지. 현조제일검이라 불린 오라버니. 평생 그들의 그늘에 가려온 교희였으나 이제는 아니다.
그녀는 황자를 보았다. 그의 눈을 보았고, 그 속에서 서로가 닮았음을 보았다.
"제가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드릴 겁니다."
분명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어린 황자에게 대책 없는 희망을 심어준 건 교희였다.
…
다시 그를 본다.
세월은 흘렀고, 더는 소년이 아닌 사내가 되어버린 길리우를 본다.
사슴같이 유순하고, 토끼처럼 어여쁘던 그는 이제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천자가 되는 날, 그대부터 취할 것이다.”
틀림없는 수컷의 눈이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는 듯하다.
이대로 영영 녹아내리거나, 그대로 타 죽어도 좋으니 그를 품에 안고 싶어질 만큼.
하나 그조차도 쉽지 않다. 뻗으려던 손을 거두는 교희의 허리를 남김없이 끌어당기는 사내에게 이끌려.
“천명天命이다.”
그야말로 미친 사랑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