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황금의 시대, 외면할 수 없는 우리들의 자화상
직설적인 메씨지와 냉소적인 시선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던 최금진 시인의 두번째 시집 『황금을 찾아서』가 출간되었다. 첫시집 『새들의 역사』(2007)로 제1회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궁핍한 삶의 모습을 특유의 상상력과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사소한 일상에서 현실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섬세하고 사유 깊은 시선이 공감의 폭을 넓히며 울림을 자아내는 수작이다.
최금진의 시는 “늙어가는 것 외에 더는 진보하지 않는”(소년들을 위한 충고」) 냉랭한 현실을 “밑바닥을 기며”(「광어」) 살아가는 자들의 절망과 슬픔이 서린 노래이다. “잠들기 전에 벌써 내일을 걱정하는 우울한 가장들”(「나는 만화책이다」), “질풍로또의 시기를 피씨방에서 컵라면으로 때우는 소년들”(「소년들을 위한 충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로또방 앞에 길게 줄을 서서/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절망을 배당받는”(「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사람들에게 “희망은 결국 자기암시일 뿐”(「원룸 생활자」)이다.
나에게도 금광이 있으면 좋겠다/금지옥엽 길러서 금의환향하는 자식 생각과/적어도 금전 걱정은 없어야겠다는 새해의 새로운 각오를 파묻어둘/토요일마다 로또방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좋을/은율, 재령,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엘도라도/감나무에 걸리는 햇살, 그 아래로 사금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은/(…)/일생에서 한번만 더 길몽을 만난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노름이나 배울까/금값이 올랐다는 뉴스를 보면 억울하고 또 반갑다/내일은 토요일, 복권은 여덟시 반까지 팔고, 일주일은 그렇게 그냥 가고/저녁별들은 황금빛을 쩔렁거리며 빛난다(「황금을 찾아서」 부분)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기는 시인 자신도 다를 바 없다. “평생 과부로 살다 지금도 과부로 사는”(「나는 만화책이다」) 어머니, “술로 밑바닥을 기다가 객지에서 혼자 목을 맨”(「뱀술」) 아버지, “평생 시장 좌판으로만 기어다니다”(「광어」) “벽에다 똥칠을 해놓고, 넋을 놓아버린”(「황금을 찾아서」) 할머니, “혀에 암세포가 꽃 무더기처럼 핀”(「젖」) 할아버지 등 불행한 가족사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고통스러운 풍찬노숙의 길을 지나 어느덧 “사춘기도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그림자 개」) 시인은 “한세상 진짜/사람답게 살고 싶었”(「꿈꾸는 눈사람」)던 소망과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읽어야 한다”(「소설의 발생」)는 것을 가슴에 새기며, “늘 고아와 객지였”(「길에서 길까지」)던 지난날의 참담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사는 건 줄기차게 도망을 하는 것이다, 우리 가문의 가훈이다/할아버지는 제 몸뚱이 하나만 달랑 지고/술항아리 속으로 달아나 가랑잎배 한 척 띄우다 가셨다/바람 빠진 바퀴와 녹슨 체인 소리를 내며 한강이 흐르는 서울/의식주가 아닌 식의주여야 하는 까닭을 깨닫느라/단벌 신사복 하나로 살아온 아버지는 항상 징그러웠다/월 이십짜리 셋방과 붙어먹은 후에 어머니는 서둘러 나를 낳고/사는 게 늘 팔차선 도로를 횡단하는 것 같았다고/재빨리 등을 보이는 버릇, 수준급이다/바닥까지 곤두박질쳤지만 우리는 바닥을 붙잡고 늘어졌다/해고, 실업, 복수 따위의 낱말들을 타고 다니며/우리 가족은 그렇게 벌레가 되어갔다(「바퀴라는 이름의 벌레」 부분)
시인은 ‘황금’의 논리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현실에서 연명하다 끝내는 절망하거나 죽음을 맞는 이들의 남루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내지만 그러한 구차함은 시인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시인이 담아내는 ‘더러운 바닥’의 풍경은 동시에 어떤 처절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이 ‘황금의 세상’을 넘어서려는 의지적 풍모 따위가 시집 내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에도, 그의 시 안에서 현실의 고통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암울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기묘한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저 고통의 현실이 실은 그 삶과 싸우는 이로서의 실존을 더욱 두텁게 하고야 마는 반작용과 마주하게 된다.
잠을 깨기도 전에 후박나무 이파리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오늘은 빌려준 돈을 받으로 어딜 다녀와야 하고/나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에게 그간 연락 못 드렸다고 잘못을 빌어야 한다/나에겐 용서받을 권리가 없다/(…)/쓰리다, 나를 무시하면 그 어떤 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천원짜리 지폐 몇장 들고 서 있는 후박나무의 빈 지갑을 모르는 척하고/나는 오늘도 사람들이 나무숲처럼 만들어낸 빽빽한 웃음의/그 컴컴한 터널 속을 걸어가야 한다(「오늘의 일과」 부분)
시인은 “로또가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지” 번연한 가운데에서도 “로또를 안 사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죄질이 나쁘다”(「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고 짐짓 냉소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모순적인 현실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몇번이고/어둠이 만든 행간의 의미를 되풀이해서 읽”(「소설의 발생」)는다. 요컨대 이 시집에는 “지나간 삶의 어느 한순간도 그립지 않다는 표면 진술과 그 너머 어떤 울림으로 존재하는 근원적 삶에 대한 심층 소망이 역동적으로 교차하고 끝내는 결속”(유성호 「해설」)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 “개 같은 비루함의 날들”(「최후의 늑대」) 속에서도 “은백양나무 이파리를 펴서 그 위에 빛나는 시를 쓰”(「길에서 길까지」)는 귀한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스위치가 없는 화장실에 앉아 몰래 흐느끼”(「12월」)고 “지갑 속에 넣어둔 일주일치 로또를 쓰다듬”(「소년들을 위한 충고」)으며 사는 이들과 시인의 시는 공생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의 삶을 증거하고, 나아가 비참한 현실에 굽히지 않는 의지를 전해주는, 아프지만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동지적 관계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초저녁잠에서 깨어/여기가 어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황망히 운다/오래된 그릇은 저절로 금이 가고/인간은 거기 담긴 한 국자의 검은 물처럼 쏟아져 대지에 스민다/물줄기가 산 아래로 흘러가 마을의 잠을 이루는 저녁/미농지처럼 얇은 잠 사이로/산수유꽃이 피어 있는 게 보인다/나는 눈을 감고도 환한 구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가/내 귀에서 어린 은어떼가 조각조각 꿈을 물어뜯고 있는가/누가 내 잠을 석회처럼 하얗게 강물에 풀어내고 있는가/발끝까지 환하다, 화안하다/(「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 부분)
Changbi Publis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