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영문학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책,
어디서도 나올 수 없는 완전한 번역,
영국 근대소설의 태동,
영국 소설 중 가장 긴 작품이자 새뮤얼 리처드슨의 대표적인 서간체 소설,
이를 맛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오늘날 많은 영어권의 일반 독자는 물론 영문 전공 학생, 교수도 한 권 분량의 축약본으로 읽는 것이 보통이다. 지만지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결정판으로 여기는 제3판을 옮겨 완전한 작품으로 선보인다. 사건 각각의 원인과 결과, 인물들의 가장 지배적인 감정이 일으키는 심리와 반응들을 음미하면서 보편적 인간성 묘사의 모든 것에 온전히 감동할 절호의 기회다.
8권 작품 전체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들이 주고받는 편지들로 이어지는 스토리, 작가의 그 독창적인 수법을 통해 사건들의 상세한 내용과 각 인물들의 심리를 가까이서 바라본다.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가 공감할 만한 사랑과 결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여주인공은 인간이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당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인다.
≪클러리사 할로≫는 역자 김성균이 교직 기간 내내 아끼며 제자들과 함께 읽은 18세기 영국 소설로, 그의 일생을 결산하는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역자는 같은 저자의 ≪패멀라≫를 읽고 영국 18세기 소설 전공의 길에 들어섰으며 ≪패멀라≫와 근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보다 완벽한 서간체 소설 기법으로 구사한 이 작품을 교직을 퇴임하자마자 의무와 같은 느낌을 받아 번역을 시작했다. 역자는 대학 시절 이 작품에서, 아름답고 총명한 어린 여주인공이 불가항력적인 고난에 강직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에서 깊이 감동받았다. 역자가 대학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함께 살아온 인물, 어쩌면 현실에서 실제로 아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인물, 클러리사 할로의 고매한 성정을 고스란히 전한다.
영국 소설 발생기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인 새뮤얼 리처드슨의 ≪클러리사 할로≫(1748∼1749)는 그의 첫 소설 ≪패멀라≫(1740)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영국 소설 중에서 가장 긴 작품이다.?
거의 모든 초기 영국 소설 연구자들은 리처드슨의 ≪패멀라≫를 영국 소설의 첫 작품으로 규정하고, 같은 시기의 필딩과 토비아스 스몰렛, 그리고 로렌스 스턴을 더해 영국 소설의 기초를 놓은 네 바퀴라고 일컬었다.?
≪클러리사 할로≫는 ≪패멀라≫를 중요한 몇몇 관점에서 수정한 작품이다. 클러리사는 패멀라와 달리 신흥 중산층 가정의 유복한 딸이다. 패멀라는 그녀를 유혹하는 주인 남자(Mr. B) 한 사람만 상대하면 되지만, 클러리사는 “Mr. B”에 해당되는 러블레이스와 그의 악랄한 하수인들 외에도 극히 권위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폭군 아버지, 그보다 더한 남성 우월주의자며 탐욕스러운 오빠, 동생을 시기하는 언니, 그 밖에 거의 모든 가족과 맞서 싸워야 하는 더욱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두 작품의 가장 큰 본질적 차이는 여주인공들이 맞서야 하는 남자들의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Mr. B는 하녀를 겁탈하려다가 그녀가 기절하면 겁에 질려 포기하고, 결국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착하게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러블레이스는 클러리사가 끝끝내 항거하고 감금에서 탈출하자 다시 찾아내어 결국 약물로 의식을 잃게 하고 강간하고 마는, 파렴치한 악한이다. 따라서 <<패멀라>>는(가)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만 <<클러리사>>는 우리가 보는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그 반대다.?
≪클러리사 할로≫는 작가가 ≪패멀라≫에서의 자신의 철학이 옳았다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재차 강조한 작품이다. 따라서 여성의 순결은 중요한 것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지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두 여주인공의 순결은 성적 순결, 즉 처녀성뿐이라기보다는 인간 고유의 기본권과 자유와 자유의지 등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을 집약한 상징이다. 그것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며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의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당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18세기 (혹은 그 이전) 작품들을 읽는 오늘의 독자들은 일반적으로 패멀라나 클러리사 같은 인물들이 성적 순결을 생명처럼 여기는 것을 당시 사회의 도덕적 경직성(또는 무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일반 독자들과 비평가들 중에는 클러리사가 결혼만 하면 해결될 일을 마다하고 죽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의 많은 독자들은 클러리사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 본연의 자유와 권리와 의지를 고의적으로 희롱하고 유린하는 자는 반드시 사회적·종교적 응징을 받아야 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끝끝내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는 작품을 착상할 때부터 비극적 결말로 이끌기로 작정했다.?
보여주기 형식의 서간문집
이 작품은 3인칭 전지 화자의 ‘이야기 들려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친필 편지들을 모은 서간문집, 즉 ‘보여주기’ 형식으로 쓰였다. 전지 화자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이나 논평을 요약하고 생략도 하면서 자유자재로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데 비해, 서간문 모음은 ‘편집자(이 작품의 모든 편지는 실제로 리처드슨이 썼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작중인물들이 쓴 것을 제삼자인 편집자가 수집하고 정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가 모든 인물의 편지를 찾아내고 모으고 선택하고 정리한다.(물론 이 작품의 편집자도 ‘불필요한’ 편지는 제외하고 어떤 것은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했다고 하기도 한다.?
리처드슨은 ≪찰스 그랜디슨 경≫(1753∼1754)까지 모두 세 작품을 썼는데 이들은 전부 일관되게 서간체 형식으로 쓰였다. 본격적으로 소설의 한 형식으로 쓰여 그 모든 기법이 완벽하게 구사되고 그 모든 이점이 철저하게 활용된 예는 그의 작품 말고는 세계 소설사상 전무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처드슨은 서간체 수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 주로 러블레이스의 입을 통해서 ‘동시에 쓰기’, 즉 사건 발생과 동시에 글을 쓴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작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을 택할 권리가 있으며, 자신으로서는 3인칭 전지 작가가 흔히 쓰는 곁가지 이야기나 에피소드 같은 것들을 삽입하지 않고, 편지들의 모음만으로 각 부분을 무난하고 명쾌하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새롭고 유일한 수법으로 여겼다.
편지로만 작품 전체를 쓰는 것은 매우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인물들, 특히 주역 인물들은 항상 펜과 편지지를 손에 잡고 있어야 한다. 편지는 원칙적으로는 함께 있지 않은 상대방에게 보내는 것이므로 작가는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격리시키거나 고립시키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인물들은 시간이 없을 때도 편지 쓸 시간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하며, 위급한 상황이나 몸이 아프거나(클러리사의 경우에는 순결을 유린당하고 나서)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도 또는 실신했다가 깨어났을 때에도 바로 글을 쓰고, 심지어 죽음을 바로 앞둔 순간에도 글을 써야 한다. 러블레이스는 야외의 달빛에서 책상도 없이 무릎 위에 편지지를 올려놓고 글을 쓴다.?
‘편지로 쓰기’는 아주 간단한 사실 하나라도, 대개는 편지 서두, 날짜, 내용, 그리고 끝마치는 인사, 서명 등의 형식을 갖추어야 독자에게 알려진다. 특히 주역 인물들은 비상한 글쓰기 취미와 의욕과 솜씨가 있어야 하고, 사건 발생과 동시에 (또는 직후에) 그것을 글로 옮길 정도로 부지런해야 한다. 따라서 독자가 보기에 사건은 더디게 진행되고, 작품의 길이는 길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리처드슨은 작품 초반에 클러리사와 가족들 사이의 긴 갈등 묘사에 대해서, 그것은 “작품 전체의 기초고, 등장인물들의 소개로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데 필요하다”라고 그 불가피성을 말한다.
이 작품은 여러 판본이 있으나 많은 학자들이 결정판으로 여기는 제3판을 토대로 옮겼다. 이 판본은 당시의 책을 그대로 복사한 것으로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철저히 다듬고 교정하고 또 적지 않은 부분을 추가한 결정본이다. 번역 시 가까운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사사로운 편지로서 대부분이 대화체지만 동시에 글로 표현되는 고답적인 문장체를 순화하고 길고 복잡한 문장들을 앞뒤를 바꿔가며 적절히 나누는 일, 특히 여주인공의 섬세한 심리와 감정을 알맞은 오늘의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역자는 내용의 의미와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는 데는 최선을 다했다. 또한 원서에서 사용된 이미지나 편집 형태를 최대한 수용·반영해 작가의 의도를 실감나고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