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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토미나

17, 18세기 영국 여성 작가 선집

Description:...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로맨스


대상이 아닌 주체로 거듭난 여성의 욕망과 사랑

영국문학사에서 한동안 잊혔다가 재발견된

선구적인 여성 작가들의 불온하고 대담한 다섯 편의 이야기


여성의 이성애적 욕망을 중심으로, 연애와 결혼, 순결과 서약, 정절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 관습과의 갈등을 다룬 17, 18세기 영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 모음집.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로도 활약한 야심가 마거릿 캐번디시,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영국 최초의 여성으로 평가한 애프라 벤, 극작가이자 출판인이기도 했던 인기 작가 일라이자 헤이우드의 로맨스 또는 연애소설amatory fiction 다섯 편을 엄선해 수록했다. 정치적 격변기에 여러 영역에서 활동한 세 작가의 개성이 담긴 이 작품들은, 20세기 후반 재조명되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남성 작가 위주의 문학사에서 배제된 여성 작가들의 업적에 주목하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혹은 사회계약론과 정신분석이론을 통해 다각적으로 해석되면서 그 문학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로맨스 장르를 갱신하고 개혁한 

근대 초기 영국 여성 작가들을 만나다


유럽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로맨스는, 18세기 초에 소설이 등장해 체계를 갖추기까지 보편적인 픽션 장르로 자리잡고 있었다.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은 영국문학사에 이례적으로 여성 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기다. 특히 이 책의 작가들인 마거릿 캐번디시, 애프라 벤, 일라이자 헤이우드는 기존의 로맨스 서사에서 여성 역할이 영웅적 남성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 정도로 한정될 뿐만 아니라 여성을 대상화하고 주변화한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로맨스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로맨스 장르 자체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담긴 작품들을 통해 불평등한 남녀관계,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억압을 고발했으며 때로는 이상적 사랑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뜨리고 조롱하기도 했다. 기존 로맨스의 수법을 능숙히 구사하면서도 재해석과 갱신을 통해 대담하고 파격적인 여성 서사를 펼쳐 이목을 끈 것이다. 대학에서 17세기와 18세기 영국문학을 가르치면서 캐번디시, 벤, 헤이우드가 보여준 놀라운 현대성에 주목한 역자(민은경, 최유정 교수)는 요즘 독자들의 관심사에 맞닿아 있다고 판단되고 학생들이 특히 재미있어한 작품 다섯 편을 엄선해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그동안 이 세 작가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며 논문을 발표해온 두 역자의 상세한 주와 해설을 함께 수록한 『판토미나』는 아직 우리에게 낯선 근대 초기 여성 작가들의 폭넓은 관심사와 상상력에서 비롯한 색다른 매력을 전해줄 것이다.



성적 억압과 관습의 굴레에 맞선,

놀랍도록 현대적인 여성 서사


2023년 탄생 400주년을 맞아 파란만장한 삶과 독특한 작품세계가 재조명된 마거릿 캐번디시는 전형적인 로맨스의 틀 속에서도 철학적 정치적 내용을 아우른 작가로, 공상과학소설 『불타는 세계』의 작가답게 과학에 대한 관심과 자연철학관도 작품에 두루 반영시켰다. 델리시아와 공작의 사랑이 계약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계약」에는 결혼계약을 맺은 남녀의 관계를 군주와 정치적 의무를 진 개인의 불평등한 관계에 빗대곤 했던 통념이 담겨 있다. 이 작품에 거듭 등장하는 ‘의무’ ‘맹세’ ‘복종’ 같은 개념은, 정치적 의무를 둘러싼 왕당파와 의회파의 갈등으로 내전이 일어나고 크롬웰의 공화정, 왕정복고가 이어지며 혼란스러웠던 당시 영국 상황을 고려해 이해할 만하다. 한편, 순결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 여성이 남성으로 변장해 자유로이 행동하며 겪는 모험을 그린 「순결의 수난」은 성폭력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크로스드레싱, 동성애, 여성군주제 등 파격적인 모티프들을 담아냈다. 당시 유행한 신세계 및 아프리카 여행기, 유토피아 서사의 영향이 느껴지는 이 작품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신랄한 풍자 또한 돋보인다.

찰스 2세를 위해 첩보원으로 활동한 이색적인 이력을 지닌 애프라 벤은 글쓰기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최초의 여성 작가로 평가된다. 수녀 서약과 결혼 서약을 차례로 저버리면서도 명예 실추를 두려워하는 이자벨라의 생애를 그린 「수녀 이야기, 혹은 서약을 어긴 미녀」를 보면, 무릇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지조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 기존 로맨스에 벤이 매우 회의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념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변심하며 서약을 깨는 이자벨라는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파멸로 치닫는다. 서로 사랑한 프랭크윗과 벨비라가 흑인 과부의 방해로 엇갈리다가 비극을 맞이한다는 이야기 「불행한 신부, 혹은 앞 못 보는 미녀」는 로맨스 서사를 가차없이 비틀며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고, 흑인 과부 무리아를 통해 인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불편하고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주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기존 로맨스에 반하는 벤의 두 작품은, 사랑이란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가변적이라는 점과 함께, 혼인에 이르고 이 서약을 유지하는 데는 현실상 돈과 생계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냉소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남녀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연애소설을 다수 선보여 “욕망의 중재자”로 불린 일라이자 헤이우드는 애프라 벤, 들라리비어 맨리와 함께 “여성 재사 삼인방”(1720년대 문인 제임스 스털링이 명명)으로 알려진 작가로, 18세기 초 소설 장르의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여성의 욕망과 판타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대표작 「판토미나, 혹은 미로 속의 사랑」은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성 보플레지르를 지속적으로 사로잡기 위해 다른 여성으로 거듭 변장해서 성적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성적 욕망이 결혼제도 바깥에서 실현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도발적이고 파격적인데, 여성의 욕망이 변장을 통해서만 충족된다는 점에서 신분사회이자 가부장사회가 가했던 제약과 억압을 인식하게도 한다.

『판토미나』 속 다섯 작품은 로맨스에서 소설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온 만큼 간접화법보다 직접화법이 주를 이루거나 따옴표 없이 대화가 등장하고, 3인칭 서사에 갑자기 1인칭 서술자가 개입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생경한 느낌을 주는 요소가 많다. 이런 특징을 되도록 살려 번역함으로써 독특한 매력을 오롯이 느끼게 한 『판토미나』는 예상을 뛰어넘어 종잡을 수 없는 결말로 치닫는 각양각색의 다섯 이야기로 짜릿한 전율과 흥미진진한 재미를 선사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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