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쓰고 싶은 오늘의 당신을 위한
지금 가장 아름다운 소설
신동엽문학상 수상 작가 이주혜의
기억, 쓰기, 회복에 관한 찬란한 이야기
“섬세하게 벼린 언어”로 “우리 사회의 유별난 젠더불평등과 그 불감증의 벽을 깊숙이 가르고 지나가는”(신동엽문학상 심사평)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온 작가 이주혜가 두번째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펴냈다. 2023년 신동엽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신작 소설이다. 치밀한 구성과 유려한 문장으로 여성 현실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빈틈과 타협 없이 파고들어 평단과 독자의 신뢰가 두터운 작가는 이번 소설에 이르러 더욱 견고하고 탁월해진 서사적 역량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소설은 한 여자가 눈앞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헤쳐나갈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하며 시작한다. 원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을 돌아보고 다시 쓰며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상처를 드러내 그것과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 기품 있는 언어로 그려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는 한 시절의 아픈 기억이 해상도 높은 문장으로 실감 나게 펼쳐질 때, 존재를 장악하여 제자리에 붙박는 기억의 힘과 기억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가려는 존재의 힘이 격렬하고 매혹적으로 부딪치며 섞이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영영 이별하고 싶던 기억을 직면함으로써 삶에 분분히 자리한 고통과 기쁨을 모두 껴안으려는 한 사람의 절실하고 눈부신 시도는 지나온 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다음을 향해 가고 싶은 이들의 마음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
무너진 자리에서 쓰기 시작한 일기,
지나간 시절을 기록하며 마침내 새로운 계절은 맞다
오십대에 접어든 ‘나’는 어느 날 남편 ‘석구’가 함께 정당 활동을 하던 여자 동료를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행동이 진심이었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는 석구에게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는다. 이후 별거를 위해 그간의 살림을 정리하고 유독 석구와만 각별했던 딸 ‘해준’과도 멀어지며 폐인과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가까스로 받게 된 정신과 상담에서 의사에게 ‘일기 쓰기’가 도움이 될 거라는 얘기를 듣는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15면)라는 의사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인터넷에 ‘일기 쓰기’를 검색하던 ‘나’는 한 글방에서 운영하는 ‘일기쓰기교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교실을 홍보하는 문장에 순식간에 사로잡힌다.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16면)
헤어지고 싶은 기억을 줄곧 간직해오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이 문장에 홀연히 이끌려 ‘일기쓰기교실’에 등록한다. 하지만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 없었”(32면)기에, ‘시옷’이라는 이름의 화자를 앞세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일기 속에 풀어놓는다. 1980년, 어둡고 혼란한 시대의 주변부에서 호된 성장통을 겪는 열살 여자아이 시옷의 이야기를.
소설의 1부에서 4부에 걸쳐 이어지는 일기는 시옷의 어린 몸과 마음에 날카롭게 새겨진 아픔을 강렬하면서도 밀도 있는 문장으로 진술한다. 여자아이였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모욕과 수치, “보지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70면)으려고 짧은 머리에 티셔츠와 바지 차림만 고집했던 날들, 간절히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맑은 소년”(61면)으로 가장해 홀로 비밀의 무게를 감당했던 그해 봄, 모든 게 들통 나며 “세계의 언저리로 쫓겨나는 것 같았던 그 느낌”(211면). 시옷이 견뎌야만 했던 건 이뿐이 아니었다. 그즈음 시옷은 “가난뱅이라는 단어의 감각을 익히는 중이었다.”(79면) 아빠는 큰 빚을 진 뒤 사라졌고, 나날이 더 절박해지는 할머니의 독경 소리와 엄마의 한숨 소리가 아빠의 빈자리를 채웠다. 가난해서 감내해야 하는 수모와 단념해야 하는 꿈이 있었다. ‘여자애’와 ‘남자애’ 중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갑자기 닥쳐온 가난 앞에서 의연한 척까지 하느라 열살의 시옷은 고단하고 슬프고 외로웠다. 지금껏 단 한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그때의 감정을 하나씩 짚어가며 ‘나’는 매일 불안과 좌절을 오가지만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시절을 다시 온전히 살아내야지만 다른 내일을 만날 수 있다는 듯이 쓰기에 매달린다. 미처 보듬지 못했던 마음을 섬세히 돌아보는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저마다 외면해온 오랜 상처를 이제는 밝은 빛 아래 슬며시 꺼내보고 싶어진다.
한편 ‘나’는 일기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이들의 이야기 또한 적는다. 옆집 친구 ‘애니’는 늘 ‘공주’처럼 빼입고 다녀 시옷을 동경과 질투로 뒤척이게 했다. 아빠가 사라진 뒤, “저희 어머니 엽차 팔아 모은 눈물겨운 돈”(81면)을 돌려달라며 집에 쳐들어온 ‘제비다방 남자’는 수상하고 무례했지만, 어린 시옷을 다정히 위로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윤수’는 슬픔과 두려움을 함께 나누는 법을 알려준 소중한 친구였고, 윤수의 누나 ‘윤심 언니’는 언제나 가난과 피로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시옷을 보면 눈이 무지개가 되도록 활짝 웃어주었다. ‘나’는 일기 속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며, 자신이 쓰고 있는 일기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340면)라 한때 시옷에게 짙은 흔적을 남기고 스쳐간 그들과 함께 쓰는 이야기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리고 시옷을 지독히도 괴롭고 어지럽게 했던, 야만과 혐오와 차별이 들끓던 그 시절을 그들 또한 간신히 통과하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와 계속된 쓰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억과 헤어지기는커녕 기억에 더욱 세차게 붙들리는 것만 같고, 망가진 현실을 다시 세우는 일은 갈수록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게다가 이제는 멀어진 그들 중 누군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소설은 그 지난한 쓰기와 회복의 과정을 끈질기게 쫓으며 마지막 장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계속 쓰고, 나아가고, 살아가고 싶은 당신이
지금 반드시 만나야 할 이주혜라는 세계
사십년이 넘게 지나도 옅어지지 않는 기억을 세밀한 필치로 절실히 기록하려는 ‘나’의 노력은 감당하기 어려운 지금을 기어코 돌파해 나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 의지가 위태롭게나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나’와 함께 일기쓰기교실을 다니는 다른 수강생들이다. 각자의 사연을 갖고 모인 그들은 서로가 쓴 일기의 첫 독자가 되어준다. “남이 읽을 일기”(41면)는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고, 자신의 글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덧붙여주는 이들 덕분에 ‘나’는 더욱 골똘히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시옷이 새로운 봄을 맞는 순간까지 써낼 수 있게 된다. 글방 동료들끼리 나누는 거칠고 솔직한 대화와 모종의 우정은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다.
이주혜는 “힘겨움 안에도 자존과 지혜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신동엽문학상 심사평) 작가인바,『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절망과 통증의 어제 속에서 “매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324면)가려고 노력했던 순간들을 건져 올려 힘겨운 오늘을 구원하는 이야기이다. 소설 속에서 ‘나’는 여태 해소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쓰며 괴로워하지만, 일기 쓰기는 다시 고통에 투신하는 일만은 아니다. “이제 나는 살았나? 살아남았나?”(76면)라는 질문처럼, 오히려 과거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생생히 살아 있는 자신을 새로이 감각하며 서서히 내면의 힘을 다지는 일인 것이다. 일기 속에서 어린 자신이 눈앞의 현실을 헤쳐가기 위해 저지른 숱한 선택들을 복기하며 ‘나’는 지금 발 딛고 선 자리에서 어느 쪽으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 고민한다. 그곳은 까마득한 절벽일까, 아니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224면) 문턱일까. 신중하고 진실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이 회복의 서사를 마지막까지 지켜보자. 어느새 읽는 이의 삶까지 뜨겁게 데우는 “이주혜의 놀라운 진심”(하성란, 추천사)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차례
1부 봄은 봄을 만나서
2부 봄이 봄을 탐했고
3부 다친 봄은 오래 울었으나
4부 봄이 봄을 옮겨붙였다
에필로그 봄은 복수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말
밤은 제 속을 보여주지 않고 한없이 낯설고도 낯익은 어떤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얼굴은 이주혜였다가 민애니였다가 정윤심이었다가 최수호였다가 정윤수였다. 그리고 언제나 시옷이었다. 작년 계간지에 이 소설을 연재할 때부터 나의 잔인함과 가혹함을 묵묵히 견뎌준 시옷이었다. 열차 출입문이 열리고 젊은 연인이 내렸다. 시옷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하자 출입문 유리창에 시옷이 다시 나타났다. 문득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차가 다음 역에 정차하면 또 시옷이 잠시 사라질 것이다. 나는 갑자기 다급해졌다. 시옷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전에 말을 걸고 싶었다. 아니, 그전에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2023년 가을
이주혜
책 속에서
무지개처럼 다채로워야 할 감정이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가라앉았다. (…) 어떤 것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모든 것이 자극이었다.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수전에 얽힌 샤워기 호스가 올가미로 보였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고 어둠은 곧 죽음이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어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입을 벌릴 수도 없었다. 음식물은 질식을 떠올리게 했다. 불안이 몸 안의 모든 통로를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갔다.(14~15면)
일기라면 사십대에 들어서면서 쓰기를 그만뒀다. 이십대부터 삼십대에 걸쳐 쓴 수십권의 일기를 마흔살이 된 걸 기념하듯이 사무용 세단기로 죄다 갈아버렸다. 사흘이 걸렸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랄까요. 자신과의 거리가 0일 때 우리는 그것을 문제적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자신과의 거리가 0을 지나 음수에 수렴하는 중이었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외부의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내면의 동굴로 걸어 들어간 패배자였다.(15면)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본 강의 소개 문구였다.
무엇과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도치가 물었다.
내가 기록한 나와. 내가 기록 속에 가두어놓은 나와.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와.
림자는 신들린 듯 대답을 쏟아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22~23면)
시옷은 집안의 중심이었다. 봄이 오고 새 학년이 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마냥 즐겁고 특별할 줄 알았던 그해 시옷의 집은 요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집안에서 한 남자가 사라지고 한 남자가 쳐들어오며 한 남자가 잉태되고 한 여자애가 사내자식으로 둔갑한다.(34~35면)
시옷이 남자애인 줄 아는 어른들은 시옷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거, 사내자식이 낯빛 흰 거 봐라.
그들은 시옷의 하얀 얼굴을,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를, 맑게 울리는 목소리를,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하는 미성을 칭찬했다. 사내자식일 때 시옷은 늘 칭찬을 듣고 매료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사내자식이 되어버린 게 그리 꺼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말 없는 거짓말의 무게만 견디면 되었다.(71면)
시옷은 병원에서 태어난 애니와 달리 집 안방에서 태어났다. (…) 시옷의 첫울음이 터진 후 문밖에서 기다리던 남자들의 헛기침이 잦아졌다. 철둑 너머 할머니는 산실을 잘 갈무리하고 나서야 미닫이 방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뭐여?
시옷의 할아버지가 성급하게 물었고, 철둑 너머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니고만요.
작게 대답하고 방문을 다시 닫았다고, 언젠가 어른들의 수다를 엿들은 적이 있다. 어른들의 부주의함에 시옷은 단단히 상처를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일을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태어난 시옷은 그후로도 여러번 비슷한 문제로 마음을 다쳤다. 상처는 잔잔했고 일상적이었다.(101면)
시옷에게 달라진 건 없었다. 시옷은 여전히 맑은 소리로 노래할 수 있었다. 주름치마를 입고 머리핀을 꽂고 입술을 붉게 칠한 것을 변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변신이라기보다 매일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사소한 변화가 아니던가. 그토록 사소한 것들이 커다란 너울이 되어 시옷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수 있다니, 시옷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시옷의 성별을 오해한 건 자신이면서 지휘자 선생님은 왜 마치 시옷이 비겁한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 것처럼 분노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지. 어린 시옷의 머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 시옷은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노래를 뺏겼다. 시옷은 노래를 잃고 잔뜩 잠긴 목으로 억억 울며 걸었다. 5월의 한복판을 울며 걷는 시옷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210~212면)
넘어가지 마.
시옷이 내 말을 알아들었나? 꿈속의 시옷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순간 나는 깨닫는다. 시옷은 문턱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알면서도 기어이 저 경계를 넘어가려 한다고.
넘어가지 마.
나는 사정한다. 시옷은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말한다. 더는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라고. 저 너머에 어떤 음험한 세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세계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통과하는 법이라고. 어린 시옷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손을 뻗어보지만, 시옷은 잡히지 않는다. 시옷은 멀리서 내게 인사하고 문턱을 넘어간다. 그 순간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224~225면)
시옷은 교복을 입은 한 소녀의 사진과 마주쳤다. (…) 시옷은 그 소녀가 엄마란 걸 알았고 동시에 엄마란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사진들 속에서 소녀는 불행이라곤 조금도 알지 못하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었다. 소녀는 한껏 사랑받고 있었다. 소녀의 미래는 온통 행복으로 도배된 것처럼 보였다. (…) 오직 행복만 누리길 축원받으며 자란 소녀의 미래가 고작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시옷은 두려웠다. 엄마가 자신을 왜 미워하는지 전부 이해한 것 같아서 시옷은 떨었다.(234~235면)
이 은행알을 땅에 심으면 싹을 틔워줄까? 골칫덩이 열매가 무사히 씨앗의 역할을 해낼까? 행여 싹이 튼다고 해도 내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어떤 미래도 기약하지 못하고 늘 과거로 도망치는 내가?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기다려 기어이 은행의 새싹을 목격한다면 그건 분명 아름다운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는 셈 치고 양지바른 곳에 심어볼까? 그리고 힘내어 기다려볼까? 어쩐지 마음이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했다.(298면)
엄마, 말해봐. 내 나이에는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게 맞지? 이렇게 어설프고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고 실수도 많이 하고 못난 말도 많이 하고 모진 말도 가끔 하고, 이러는 거지? 그렇지? 내 나이 때 엄마는 어땠을까, 어제 처음으로 궁금해졌어. 엄마는 어떤 이십대를 통과해 아빠를 만나고 나를 낳고 지금의 엄마가 되었을까? 어디서 넘어져보고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을까? 일어나긴 했을까? 엄마에게도 지금 나와 같은 시간이 있었을 텐데, 너무나 당연하고 당연한 일인데 나는 왜 그 시간이 한번도 궁금하지 않았을까?(320면)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324면)
추천사
한 남자가 사라지고 한 남자가 쳐들어오며 한 남자가 잉태되고 한 여자아이가 ‘사내자식’으로 둔갑한 그해의 기억. ‘나’는 일기쓰기교실에서 자신의 기억을 ‘시옷’이라는 화자를 앞세워 어렵게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해의 비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어느새 시옷의 이야기는 ‘애니’의 이야기, ‘윤심’과 ‘윤수’의 이야기, ‘수호’의 이야기가 된다. 야만과 혐오와 차별을 통과하는,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와 동시에 의심이 싹튼다. 이 ‘일기’는 얼마만큼 사실일까? 작중 인물들이 시옷의 일기를 듣고 ‘소설 같다’고 말하는 순간, 이야기에 불현듯 균열이 발생한다. 이 균열은 이주혜가 소설이라는 장르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보리차가 팔각 컵에 담기면 엽차가 되는 소설의 장면처럼 어떤 이야기는 어떻게 전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송아지 눈망울 같은 진심과 만나게 된다. 소설을 향한 이주혜의 놀라운 진심 말이다.
하성란 소설가